부활 제 4주일 (성소주일)+ 요한 10,11-18

2012. 4. 29. 오전 7:02:44

글자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이민의 날)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하는 성소 주일이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한 주일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라는 말씀에 따라, 교회는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한 더 많은 기도와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임복만 신부는 1910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935년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1942년 그는 일제의 수탈과 핍박을 피해 조국을 떠난 조선인 양 떼를 찾아 만주로 파견됩니다. 그는 해방이 되어 귀국하다가 만주의 장춘 교구장인 고 주교를 만납니다. 그때 고 주교는 “지금도 만주에 조선인 교우가 남아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임 신부가 “아직도 많은 교우가 남아 있습니다.” 하자, 주교는 “목자가 자기 양들을 버리고 가면 그 양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임 신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귀국길의 발걸음을 돌려 양들을 찾아 만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 뒤 그는 45년 동안 긴 감옥 생활을 하고, 지하 교회에서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하다가 또다시 투옥되어 온갖 고문과 구타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고 이겨 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수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젊은 시절의 다짐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1984년 중국의 조선족 신자를 통해 임 신부의 생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고령의 그는 귀국을 권유받지만, “비록 고국이 그립기는 하지만 목자인 내가 어찌 불쌍한 양 떼를 버리고 나만의 안녕을 좇을 수 있겠느냐.” 하며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풍과 노환으로 거동이 힘들어지자 중국에 있는 신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1992년 귀국합니다. 그리고 1994년, 하느님의 품에 안깁니다. 평생을 양들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던 그는 목자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준 우리 시대의 착한 목자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부부의 만남,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연출하신 것이지요. 그러기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건강한 목숨이 될 수 없습니다. 목숨을 운전한다는 것이 ‘운명’(運命)이라는 말의 ‘숨은 뜻’입니다.
어떻게 이 만남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복음 말씀에 열쇠가 있습니다. ‘착한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할 말도 못하고 남에게 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는지요? 그러나 착한 마음 뒤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께서 작심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착한 마음은 ‘참을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듯’ 덮어 주는 마음입니다. 성질대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곁에는,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어린이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만남은 꽃입니다. 꽃이 싱싱하고 아름다우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이렇듯 ‘상대를 참아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베푸는 일입니다. 만남의 연출자는 주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지금의 만남을 주선하셨다면 앞으로의 만남에도 개입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미래를 그분께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 10,11-18

부르심에 응답하시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이전에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 받은 대로 그 부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별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감곡매괴성모성당 공동체에서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가 배출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 가야 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 하고 제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째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가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손위 누나가 공무원 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께서 어머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 이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 것을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이십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지금도 매일 기도하십니다.
가끔 집에 들를 때가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시면서 꼬박 꼬박 졸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걸려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래요. 당신이 할 것은 다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자동차 옆자리에 여자 신자 분이 앉으신 것을 보고는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다 보지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교포사목 중에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 할 때 반대 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어미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쨌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 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서 어울리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이해타산으로 썩어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희생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성소자 발굴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물질적인 후원에도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항상 제일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될 사제나 수도자도 자식 중에 제일 나은 자녀를 선택해 주시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직자, 수도자의 길이 성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하면서도 자녀를 봉헌하시라고 하면 얼굴색이 확 변하는 분도 계십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좋긴 좋은데 내 자식은 말고 다른 자식 중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그런 생각을 거두시고 내 가정에서 성직자, 수도자가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길 희망합니다.
성소는 본인과 그 가정,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더 많은 젊은이가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작은 연못>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희 집 성모상 밑에 아주 작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물의 유입이 없지만, 가끔씩 큰 비라도 내리면 야산으로부터 여과된 맑은 물이 흘러들어 어느 정도 신선도를 유지하는 작은 연못입니다.  그래서 이 연못에 새끼 비단잉어들을 사다가 풀어 넣었습니다. 빨간 녀석들, 노란 녀석들, 하얀 녀석들, 점박이 녀석들...
 틈나는 대로 사료도 먹이고, 지렁이며 벌레며 자연산 먹이도 먹이며 성장하기를 기다렸는데, 성장속도가 얼마나 더딘지 일 년이 지나도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공주 마곡사나 남원 광한루 큰 연못에 모여 사는 팔뚝만한 비단잉어를 생각하며 열심히 먹이를 주고 기다렸는데, 결과는 왕실망이었습니다. 열심히 들여다봐도 그냥 그대로인 것입니다.혹시나 하고, 녀석들을 끌어내어 좀 더 넓은 연못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쯤 가봤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곡사나 광한루 녀석들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있었습니다.

 성장 환경이라는 것,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비단 잉어들은 연못의 크기에 따라 성장 속도가 놀랄 만큼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는 성장이 극히 더딘 반면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는 초스피드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비단잉어만 그렇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양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아이가 착한 시민,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쾌적한 성장환경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 쾌적한 성장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숱한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정말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인도자, 동반자, 지도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도 그에 걸맞게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입니다.  월급 받고 일하는 삯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삯꾼들에게 양들은 무엇입니까? 귀찮고 짜증나지만 월급을 받으니 마지못해 돌봐야 될 스트레스 덩어리들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에게 양들은 누구입니까? 사랑의 대상, 헌신의 대상, 봉사의 대상입니다. 착한 목자에게 양들은 기쁨의 원천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착한 목자에게 있어 양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들입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보고 싶고, 혹시라도 한 마리 잃어버리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찾아 헤매는 연인 같은 사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착한 목자,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목자
-허영엽 신부-

 

2차세계 대전중인 1941년 2월 폴란드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한 수도자가 독일 나치군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포로 한 명이 탈출을 하고, 그 벌로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그 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놓고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함께 수감된 수도자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수도자의 행동은 독일군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어갔습니다. 그는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에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입니다. 이 성인은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착한 목자의 모범이 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목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양들을 지킵니다. 양들이 위험할 때 도망가는 목자는 삯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들은 풀을 따라 이동하다가 밤이 되면 들판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목숨을 내놓고 맹수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위험할 때 일수록 양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목자야말로 착한 목자입니다. 이 기준은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할 때 나만 살겠다고 뒷걸음친다면 분명 엉터리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와 양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편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성을 잘 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목자가 양을 잘 안다는 것은 양의 건강상태와 성격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잘 알기에 양들은 믿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인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모든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성소를 위한 주일입니다. 혼탁한 오늘날의 세상은 더욱 더 착한 목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님! 목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가 더 많게 하시고, 목자들이 더 착한 목자가 되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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