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대축일

2012. 4. 8. 오전 8:39:54

글자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9)

  


 

말씀의초대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돌아가시게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시게 하셨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부터는 천상의 것을 좇으며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제자들은 무덤으로 달려가서, 보고 믿게 된다(복음).

  

    
☆수경요법☆

 

오늘의 묵상

 

주일 학교 교리 시간에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선생님, 천국에 가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심을 죽이고, 욕심을 죽이고, 미움을 죽일 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랑이 미움을, 용서가 증오를, 평화가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빛은 암흑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거짓과 위선이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폭력이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증오 앞에서 사랑과 용서로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이기심과 거짓 앞에서 이타심과 진리로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죽인 그 자리에 부활의 싹을 틔우셨습니다.
부활은 건너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입니다. 향락과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건너감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에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던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감입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수경요법☆

 

지난겨울은 길고 추웠습니다. 겨울 같지 않은 날씨였다가도 갑자기 동장군을 보내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했습니다. 새봄이 오자 그때의 기억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경제 사정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기대하건만 여전히 불황은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합니다. 직장을 떠나야 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맞는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혼자만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감사드릴 일이 분명 있습니다. 다시 주님의 이끄심을 간청하는 부활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의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애정이 무작정 그녀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을 목격했고, 부활을 증언하는 첫 여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예수님만을 생각했던 막달레나의 용기가 복음의 주제입니다.
기쁨은 언제나 잠시입니다. 돌아서면 같은 날이 늘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런 날의 연속이 삶의 거름이 되고 뿌리가 됩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화사한 꽃밭으로 바뀌게 합니다. 그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그날을 희망하며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살아 있는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면 말입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분이라면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더욱이 그 부활이 그분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질 일을 미리 보여 준 사건이라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일입니까? 모든 것을 포기해도 그것만은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거기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부활! 이보다 더 큰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 -

문종원 베드로 신부님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복음사가들은 곳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 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나누시는데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평범한 일상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한 번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반을 끝내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며칠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배반했던 것을 떠올리듯 예수님께서는 세 번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친구 사이의 사랑과 모든 사람들을 향한 폭넓은 사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등장하는 데 그들은 기쁨과 두려움에 떨며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습니다. 
  루가복음사가는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쁨"이라는 말을 언급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온전히 기쁨을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화를 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감정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부활하신 후에는 화를 내지 않으실 것 같은데 예상을 뒤엎습니다. 엠마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두 명의 제자에게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며"(마르 16,14)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도전은 이기심으로 생기는 노예 상태로 부터 믿음을 통해 순명하는 자유의 상태로 옳아 가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빠스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슬픔과 고뇌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영원한 생명을 준 사건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은 승화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고통은 초월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빠스카의 의미입니다. 곧,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도정에서 고통과 죽음을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아주 탁월하게 변형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숭고한 생애와 연결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합니다. 우리 존재는 유한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영원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빠인 나자로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부활을 밑고 복음 전할 의무

-배광하신부-

 

진실로 끊어 버립니까?
알렐루야! 온 세상천지의 만물들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부활은 실로 자유이며 해방이고 다시 살아남입니다.
가슴 벅찬 부활의 감동을 우리는 부활성야의 밤부활 찬송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용약하라, 하늘 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 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 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이처럼 감격의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부활이 진정 인간사의 모든 속박을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혔던 모든 불목이, 결코 풀리지 않았던 대화와 타협이,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여러 굴레에 묶였던 그 모든 사슬에서 진정 해방되었음을, 부활하였음을, 저 치욕과 죽음의 십자가를 끝내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하여 그 모든 해갈이 이루어졌기에 진정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의 부활은 결코 죽은 송장의 뼈에 살점이 붙어 땅을 뚫고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은 죽음 뒤에 오는 영생의 시작만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 순간 생의 나날에서 부활의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철저한 자기희생의 결과로 얻어지는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이제민신부의 말처럼우리는 생각을 돌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부활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던지는 삶의 메시지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은 남을 위하여 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이기심과 욕심으로 현실을 잘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라는 교훈은 진정 옳은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 이래로 끊임없이 고백해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은부활 신앙이라고, 그 같은 부활 신앙을 살기 위하여 장엄한 부활 성야의 거룩한 밤, 세례 서약 갱신의 약속을 또다시 살아야 합니다. 죄를 끊어 버리고, 악의 유혹을 끊어야 하며, 죄의 뿌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진정 부활의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 올무이며 사슬인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 부활의 해방과 자유를 맛본 우리에게 사도 성 바오로는 옛 죄의 종살이에 매이지 말도록 일깨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 1).
진실로 믿습니까?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첫 시작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사실 신앙은 믿음입니다. 도대체 동정녀가 아들을 가졌다는 믿지 못할 성경의 가르침, 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이 모든 믿을 수 없는 신비의 고백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의 신비를 그대로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는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첫 걸음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와 믿음이 이 놀라운 기적의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 옛날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부활을 설명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뒤늦게 깨달았던 제자들의 뜨거운 감동을 우리 또한 느끼도록 만들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스스로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했던 슬픈 죽음을 체험한 이들의 통곡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서글픈 죽음, 조국과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인간 존엄을 위한 민주와 박애를 위하여 헌신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의 죽음은 허무한 절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그 부활 믿음을 사는 우리는 또다시 부활 성야의 장엄한 예절 중 세례 서약 갱신의 믿음 고백을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믿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체념과 좌절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신앙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할 부활의 의무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사는 신앙인들의 자세는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 2)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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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믿었다.

-구요비신부-

 

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이제는 고인이 친지들이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

뇌리와 추억에서 잊혀지기보다 생생하게 떠오르고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지 나의 기억 비상하 때문이 아니고 어쩌면 이분들이 계속 존재하며 살아 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예감이 들곤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술인 코린토 전서 15장을 읽다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 부활 이전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먼저 전제한다(13, 15, 16) :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희랍의 현자들이 간파한‘영혼의 불멸성’이나 불교의 가르침인‘환생(re-incarnatio)’이 죽음 너머의 지속적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염원과 희망을 표현하며, 이를 나름대로 통찰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어쩌면 오늘 리가 경축하는 주님 부활에 대한 전이해(?)라고도 겠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가 본‘빈 무덤’은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시는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죽음은 결정적이지 못하다. 느님의 아들로서 지니신 신성(神性)으로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生命)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는 생명만이 있기에 죽음은 결코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속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인간성(人性)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神性) 확인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어 육신이 영혼과 분리된 뒤에 육신은 항상 신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인간의 구성체인 영혼과 육신 안에 남아 있는 신성(神性) 단일성으로 둘은 다시 결합됩니다. 이처럼 구성체의 결합이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오고 분리된 결합으로 부활이 일어납니다”(니사의 그레고리오).

한편, 무덤 안에서 천사들은 한결같이‘그분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루카 24,7; 마르16,7) 전한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이다 (요 20,9). 하느님께서는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시 당신의 언약이 담긴 말씀에 성실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말하며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와 죽음보다도 강하시다.

그러므로 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길은 오늘 복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처럼 예수님에게 걸었던 인간적인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린‘어둔 밤’가운데서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주님과의 관계와 사랑에 충실할 때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에게“그대는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이기양신부-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 사업 헛되도다!"
 부활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어떤 본당신부가 엄청난 금액의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욕심이 생긴 신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복권을 어디에 숨겨 둬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문제는 눈치 빠른 보좌신부라는 생각에 본당신부는 여기저기를 찾다가 지하 소성당의 비어 있는 감실을 생각해냈습니다.
 신부는 아주 흡족한 마음이 되어 "여기에는 주님이 계시느니라!"는 글귀와 함께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난 신부는 지하 소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감실문은 활짝 열려 있고 감춰 두었던 돈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감실 안쪽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고 여기 아니 계시느니라!"
 웃자고 한 말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마침내 예수님 부활이 인간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예수님 이전을 B.C(Before Christ)라 부르듯이,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정점에 예수님 부활이 자리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 탄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통해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애써 이뤄놓은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무()로 되돌리는, 알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제의 노력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한계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죽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원한 세상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파괴도, 종말도, 끝도 아닌 새로운 희망이자 영원한 생명이 됐습니다. 예수님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씀하시면서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사건임을 증언하셨고 일생을 예수님을 선포하며 사셨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십자가의 길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유혹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마태 16,24)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서민이든 영웅이든 제 십자가를 성실하게 진 사람만이 부활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발명왕 에디슨조차도 엄청난 시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전구를 발명할 때까지는 2000번 실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그토록 실패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실패라니요? 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전구가 빛을 내지 않는 2000가지 원리를 알아냈을 뿐입니다"라며 성실하게 노력했고, 1931 1000개가 넘는 발명 특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차동엽, 「무지개 원리」 28)
 신자로서 부활을 산다는 것은 어려움과 역경이 절망으로 이어지고마는 이들과는 달리,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기꺼이 짐으로써 성숙과 은총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생로병사 과정 속에 어려운 상황을 예외 없이 맞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똑같이 주어진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불사불멸의 열매를 맺으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날을 경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세례를 받는 19명의 예비자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확실히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첫 영성체하는 분들에게도 주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고 앞날을 비추어 주시길 청합니다.
 
서로 부활축하의 인사를 나누시지요.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이 기쁘십니까? 왜? ‘나도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영원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순절이 끝나서 기쁘답니다!!!!” 절제와 희생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었나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희생과 속죄,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십자가를 구원 받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고 아울러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의 절정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죄와 죽음의 지배는 사라지고 영원한 세계로의 희망이 열린 것입니다. 인류는 주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소식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활의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결국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지구에 돌아와 “아무리 우주를 돌아보아도 하느님은 안 보이더라”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신부님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우주를 많이 돌더라도 하느님은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답니다. 부활의 기쁨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귀하게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는 것이 부활의 큰 진리입니다.”(미국 필립스 브룩스주교)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좌절과 절망을 가져왔지만 부활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미움과 분노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 희생과 봉사, 사랑의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영원한 천상행복의 약속된 미래를 보고 오늘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지금 나를 도구삼아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오늘 여기서’ 살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매괴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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