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35-48)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 39) 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 세상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 죄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의 공로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의 부활로 함께 숨 쉴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증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증인을 희랍어로 marturia라고 한다.
이 말은 증거자, 보고 듣거나 경험한 것, 혹은 신적 계시나 영감으로 안 바를 확증하는 사람이다. 즉 증인이란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그냥 내세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살도록 부르셨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셨다. 그렇게 모든 일을 다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신 다음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한 모든 일을 증거 해야 할 사람들이다. 즉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일들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 한다. 제자들은 그 일을 증거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해야하고 보여 주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일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고 삶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기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어야 한다. 자기가 전하는 말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다. 말만하고 생활은 다르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증인이 아니다. 증인이란 삶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며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거짓이라고 말하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사실이라는 것을 자기의 삶을 통해 보여 주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이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내세우셨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를 증언해야한다. 예수님도 증인의 삶을 사셨다. 무엇을 증언하셨는가? 성서를 증언하셨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성서의 기록을 증언하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삶은 성서를 증언한 삶이셨다. 즉 성서에서 예언했던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헛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성서에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그러니까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진리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성서에 예언했던 대로 고난을 받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성서의 모든 예언들은 거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성서에 기록된 삶을 사 심으로써 성서의 말씀을 증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생명까지 바치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증언해야할 내용들은 바로 성서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성서의 말씀을 증언하셨듯이 우리도 성서의 말씀을 증언해야 한다. 그러려면 성서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모르면 증언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이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신 노력은 성서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서를 깨닫게 해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내세우셨지만 우리가 성서를 깨닫지 않고서는 증인이 될 수 없다. 증인으로 내세운 제자들이 성서를 깨닫지 못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라.
그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성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예수님도 여러 번 예고를 하셨던 일이다.
예수님은 성서의 기록된 대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성서의 예언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획인 시켜 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또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생활하셨을 때에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무서 워 하고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이 성서를 믿었다면 또 성서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았더라면 결코 그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이 무섭고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한 것은 모두 성서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수난과 부활 예고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하고 물으시고 제자들이 가져다 준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서의 말씀을 증언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성서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노력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었고, 당신이 성서의 말씀을 증언함으로써 제자들도 성서의 말씀을 깨닫고 그들도 성서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성서의 말씀이 진리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내세워졌다. 성서를 증언하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 제자들처럼 두렵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증인이 아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성서의 말씀을 증거 하는 증인이 필요하다. 성서의 말씀이 참 진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며 모든 일은 성서의 말씀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생명을 바쳐 증거 하는 증인이 필요하다.
성서를 증거 하도록 불리 움 받은 이들은 많지만 정말로 성서를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증인으로 내 세워진 우리들도 성서를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성서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서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증거 할 수 있겠는가?
성서를 증언하려면 먼저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오늘 또 다시 성서의 말씀을 증거 하라고 불리 움 받은 날이다. 예수님이 증인으로 내세운 날이다. 복음을 깊이 묵상하고 생활하자.
-유 광수 신부-
행복한 사람의 속옷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3,13~15.17~19 (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제2독서 Ⅰ요한 2,1~5a (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속죄물이 되셨습니다)
복 음 루가 24,35~48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유령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직접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영과 육의 부활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엄연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 부활 신앙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있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무식했고 아무 능력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는 부활 신앙에 확신을 가졌으며 자기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앉은뱅이를 고쳐 주기까지 했습니다(사도3,1~10참조). 이에 사람들이 놀라 구름같이 몰려들자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설교를 했는데 그때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이상의 능력도 나옵니다. 그러나 죽은 예수님만을 믿으면 그 믿음은 주저앉게 됩니다. 믿음 자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냉담자를 만났는데 이 사람이 날 보고, "한 달에 두 번은 성당에 나가겠습니다."하며 무슨 선심쓰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뭔 말인고 하니 한 달에 주일 네 번 중에 두 번은 성당에 나오고 두 번은 놀기 위해 못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교환조건으로 봐 준다는 투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하시면서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믿지 못하고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매사에 자신이 없이 당황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치 유령 보듯 하기 때문에 믿음을 허깨비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축으로 하는 우리의 믿음은 그 자체가 삶의 진정한 에너지입니다.
부활은 그래서 놀라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에 도 구속받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한 기쁨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만족할 줄 아는 기쁨이요, 아무리 병들어도 마음만은 건강할 줄 아는 기쁨이 됩니다. 부활은 그 자체로 놀라운 생명이며 환희입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인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소년이 찾아와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입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행복의 기쁨이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병만 더 커졌습니다.
나중엔 왕자가 직접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오두막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에서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성가와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왕자는 이 집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집이라 여겨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속옷을 벗어 달라고 했으나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자 칼로 위협하고 겉옷들을 벗겨 보니 속옷들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속옷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자는 거기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행복은 돈으로도 못 사고 권력이나 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행복은 오르지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좌우간 임금은 믿음을 갖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살면 겨울에 속옷을 입지 않아도 춥지 않으며 입에 풀칠을 못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최후가 그처럼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삶의 큰 힘이요 축복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부활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부활이며 우리의 인간 삶의 목적도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놀라운 감격과 축복으로 열려지게 됩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주님의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며 부활의 삶을 기쁘게 살도록 합시다.
허물은 기억하지 않고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 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당신을 내 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55,8.9)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에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는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