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 마르코 4장 26-34절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오늘의 묵상
지난해 봄에는 2천 평 되는 밭에 열무와 감자를 심었습니다. 씨를 뿌리고 일주일이 채 되기 전에 싹이 나왔습니다. 열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열무를 뽑을 때가 되자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 본당 할머니들을 동원했습니다. 할머니들에게는 열무를 팔아서 본당 살림에 보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야채 시세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동안 할머니들만 고생시키고 말았습니다.
감자를 캘 때가 되자 계속해서 비가 왔습니다. 땅이 말라야 감자를 캐는데 도무지 비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보름 넘게 오던 비가 그치자 감자를 캤습니다. 그랬더니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긴 장마에 감자가 모두 썩은 것입니다. 결국 감자를 심어서 씨앗도 못 건졌습니다.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련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논의 벼가 자기 벼보다 더 많이 자란 것을 보고 시기한 나머지 자기 논의 벼가 잘 자라도록 조금씩 뽑아 올려 주었으나 결국 벼가 다 죽었다는 얘기에서 나온 고사성어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생명을 키우고 유지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지 않으시면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하루를 살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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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입니다. 때가 되면 잎이 나고, 시간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보이는 나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의 성장은 뿌리가 좌우합니다.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줄기로 보냅니다. 그러니 뿌리의 활동이 멈추면 나무는 절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면 이미 뿌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시간’입니다. 그 부분이 튼튼하면 줄기는 자동적으로 건강해지고 꽃은 당당하게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기도 생활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성사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 ‘신앙이란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정성으로 다가가면 큰 믿음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강한 겨자 나무도 뿌리가 시원찮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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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됩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 ‘생명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도 ‘그냥’ 흘려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붙잡으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어느 날 문득 ‘좋은 일’을 하고 싶고 기도가 가까이 느껴지게 됩니다. 말씀 한마디가 ‘프로그램 작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숱한 병자들을 고치셨고, 악한 기운을 몰아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모두 한마디 ‘말씀’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도 ‘땅’입니다. 거대한 조직체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 안에는 살과 피와 뼈와 엄청난 세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는 미지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 땅 구석구석에 주님의 ‘말씀’이 닿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끔은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면 정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건성으로 모시는 성체라면 감사의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성당 안에서까지 세상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분심도 습관인 것이지요.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정성이 ‘삶 전체’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나로부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는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어떤 표현을 합니까? 그 표현이 상황 상황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봉급이 작을 때 ‘쥐꼬리만한 봉급’, 방이 작을 때 ‘콧구멍만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작을 때 ‘단추 구멍만한 눈’ 밭이 작을 때 ‘손바닥만한 밭뙈기’
유다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 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기가 작습니다. 씨앗의 직경은 대개 0.2mm정도랍니다.
11월경에 씨앗을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키가 커가면서 한 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 잡으면서 마치 나무처럼 커지기 시작합니다. 겨자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자라지만, 특히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이 서식합니다. 유채꽃 빛깔의 길쭉하고 재미있는 꽃도 피는데, 2-3월경 갈릴래아 호숫가를 산책하다보면 온 산과 들이 겨자 꽃으로 인해 노랗게 물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 한 가지는 그 작은 씨앗이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자라면 2-3미터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르단 강 기슭이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는 3-4미터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와 앉기까지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폭발적인 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장의 속도나 위세가 대단한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도래하게 될 최종적이고 궁극적 구원, 결정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완료될 때 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 말씀의 성장, 교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할 예수님의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하느님 나라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오늘 날의 겨자씨 한 알’인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란 존재, 때로 죄투성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언제 인간될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 안에는 은총의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씨앗을 싹 틔어야겠습니다. 멋진 나무로 성장시켜야겠습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고 그늘도 만들어 세파에 지친 어린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나의 작은 회심, 오늘 나의 새 출발, 오늘 나의 결심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몸짓입니다. 나의 작은 시작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의 손길이 보태지면 엄청난 에너지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도록 간구하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다윗의 왕권은 굳어졌고, 이제 다윗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만큼 군사력도 강해졌다.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전투를 일임하고 궁성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궁전 옥상을 거닐던 다윗은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 바쎄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고, 그녀와 정을 통하였다. 그는 분명 남의 아내를 탐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 더 가증스러운 것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도록 한 것이다. 신심 깊은 다윗,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셔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다윗, 모든 백성들로 부터 우러름과 신망을 받는 왕, 그의 믿음이나, 인품, 능력 등 그 어느 것도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지었던 것이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죄는 더 큰 죄를 낳는다.
흔히 사람들은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만 해결된다면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병고, 가정 문제 등 어려움이 해결되면 더 열심히 살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이 해결되면 더 열심히 살기 보다 오히려 죄악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울 때에는 열심히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살던 부부가, 형편이 나아지자 외도를 하고, 급기야 이혼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육적인 욕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욕구를 다스리지 않고 버려둔다. 육적 욕구는 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기회가 되기만 하면 튀어나오려고 대기하고 있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등등 육적 욕구는 끝이 없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재미있고, 좀더 즐기려 하고, 급기야 쾌락에 빠지도록 한다.
가난할 때, 능력이 없을 때, 형편이 어려울 때, 이 육적 욕구는 억눌려 있어서 자신도 그 욕구가 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형편이 풀리고, 능력이 생기고 재물이 늘어나면, 억눌렸던 육적 욕구가 서서히 들고 일어나 정욕을 발산하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가 좋아지면 죄를 짓고 타락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사람이란 그러한 존재다.
성왕이라고 칭송받던 다윗, 신심 깊은 다윗도 그렇게 바쎄바와 정을 통했고,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다. 주변의 상황이 좋아지고 편해지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다윗의 마음속에서 육적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육적 욕구에 따랐고 죄를 지었으며, 죄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죄를 지었다.
다윗은 신심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도 정욕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성령의 힘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처럼 죄를 짓는 다윗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다윗에게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다윗처럼 같은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하고 말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살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다스리며 살아갈 때, 우리는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육체의 욕구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성령의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
다윗의 죄를 통해 내 자신의 죄를 보고,
내 주변의 상황이 좋아질수록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며,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자.................◆
큰 나무가 되어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