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마르코 16,15-20

2012. 5. 21. 오전 12:30:32

글자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 마르코 16,15-20



 
   이별만은 말아줘요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 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마태복음28장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신명기에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 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고 적혀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이들이 대표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와 봤어 봐라.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버리는 것이 마귀를 쫒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애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19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무슨 말을 듣거든 마음에 묻어라. 어리석은 자는 무슨 말을 들으면 옮기지 못하여 산고를 치르는 여인처럼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말을 옮기지 못하면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양 못 견뎌 한다.”하고 말합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야훼께서 뱀에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뱀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그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된다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 때 사용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성모마리아 상’을 보면 어머니께서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미사 안에서 영성체 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계단”의 동의어는 “단계”랍니다.

단계는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쳐 쓰러지지 않게
               여러 계단 건너뛰지 않고 하나씩 밟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계단”의 반대말은 “다단계”입니다.

다단계는 걸려 넘어질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가지
         여러 계단 건너뛰다 결국 바닥을 확인하는 인생이랍니다.


천국을 향한 인생여정에서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야 하겠습니다
.




         

사랑하는 삶이 복음입니다.

그가 남긴‘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마르코의 향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그가 사랑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그 향기는 멀리 그리고 오래 동안 퍼져 나갑니다.
마르코의 향기는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시들지 않고 더 큰 감탄과 감격을 자아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께 대한 마르코의 사랑 고백서입니다.

당신은 버스터미널에서 하루 종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고 소리치며 전도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은 칭찬할 만하지만 복음 선포는 입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꽃들은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꽃들의 향기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갑니다.
보는 사람마다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은은한 향기에 감격합니다.
나비와 벌들이 감미로운 향기에 끌려서 날아옵니다.

온 세상에 두루 복음을 선포해야 할 소명(召命)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 예수께 귀의(歸依)하고 그 분을 사랑하면 누구나 감미로운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당신의 맑고 밝고 아름다운 삶이 또 다른 복음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이웃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 영구신부-






<가장 낮은 곳에 계시는 주님>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제자들은 주님과 또 한 번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 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마치 부모님들 동남아 효도 관광 여행 떠나는 분위기입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 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이후 그제야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제1독서(사도행전) 말미에 기록된 두 천사의 질문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 말이 제겐 이렇게 들리더군요.


   “왜 뜬구름 위에서 살고 있느냐? 왜 움직이지는 않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느냐? 왜 ‘때깔 나는’ 것만 찾고 있느냐?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 왜 ‘있어 보이는’ 척 하느냐?”


   어쩔 수 없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하늘만 쳐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 세상 한 복판으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죄와 타락과 고통이 뒤엉킨, 그래서 짜증나고 힘겨운 인간 세상 한 가운데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과거 교회는 보통 도시의 한 가운데,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곤 했습니다. 세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높은 곳에 고색창연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 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까마득한 교회의 첨탑 위로 끌어올리기보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삶의 현장 한 가운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라진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향했던 우리들의 시선을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돌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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