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생명의 빵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
최호 요한 보스코 신부
주일 코미디 프로그램에 보면, 어떤 잘 생긴 총각이 인상을 잔뜩 쓰고 나와서, ‘내가 누구 게’라고 관중들에게 소리칩니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난 개그콘서트의 히든카드 이정수야’라고 말입니다.
그럼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길 가다가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데, 멱살을 잡힌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사회적 위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는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하느님께서는 “너의 이름 말고. 네가 누구냐”라고 되묻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개똥이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하면. “너의 가족관계 말고, 네가 누구냐”되물으시고 “저는 작은 회사의 사장입니다”라고 말하면. “너의 직업 말고, 네가 누구냐”고 되물으시고 “저는 건강하고 돈이 꽤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너의 상태 말고, 네가 누구냐“라고 되물으셨다고 합니다.
저보고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신다면, 일단 범물성당 보좌신부라고 대답을 할 것 같지만. 저의 전부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딱 한 마디로 말씀해 버리십니다. ‘생명의 빵’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오늘 복음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신통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담긴 뜻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27절)고 말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지만...아무리 먹어도 사람은 결국 죽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먹는 것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썩어 없어질 빵은 우리도 역시 썩어 없어질 존재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명의 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썩어 없어지게 하는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는 양식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먹혀도 괜찮습니다. 씹히는 빵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우리가 영원히 배고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빵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위해 지금도 다가오시는 그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감사의 가장 좋은 방법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밥이 되고 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히는 분이심을 드러내셨고, 또 우리에게 먹히려 오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먹힐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체의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제 우리는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빵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시고 배고프지 않게 살아가고, 또 그 충만함을 또 누군가에게 먹여 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고...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부를 드러내는 말일 것입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성, 무한성>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소년의 손때 묻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해도 5천명, 모두 합치면 만 명 가량은 족히 될 큰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마디로 ‘훅’ 갔습니다. 빵을 많게 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제 고생 끝이다, 이제부터는 이분이 계속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거듭하실 것이고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로 애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분만 따라다니면 평생 굶어죽지 않겠구나. 그간 숱한 고초를 겪어온 우리 민족의 해결사이니 이분만 따라다니면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그런 확신이 선 군중들은 그때부터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일부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위에 앉혀야 한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일찌감치 그들을 피해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군중들의 마음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말로 ‘사생팬’ 저리 가라였습니다. 군중들을 따돌리는 예수님을 집요하게 추적하기 위해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군중의 모습,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갈 길이 먼 군중, 오로지 모든 관심이 인간적, 세속적, 지상적인 것에만 머물러있던 군중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과 영원히 살게 하는 영혼의 양식을 비교 대조하시면서 세상의 양식에만 온통 쏠려있는 그들의 시선을 한 차원 끌어올리려고 애를 쓰십니다.
세상의 양식이 지닌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허기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한번 배부르게 먹었다고 그 포만감이 며칠, 몇 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결코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유한성, 한계성을 지닌 빵이 세상의 빵인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 시절 모세 역시 일정한 기간 동안 만나의 기적을 통해 사막을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그 기적의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일을 집행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나의 기적은 한정된 기간 동안만 이루어졌기에 지속성, 영원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만나는 시나이 사막을 지나가던 얼마 안 되던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생명의 빵의 특징은 영원성이자 무한성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만 시행되는 한정 특별 이벤트가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상설 이벤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 빵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빵입니다. 그렇게 명쾌하게 잘 설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깨닫지 못하고 이런 청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직도 군중들은 자신들의 시선을 한 차원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 문제, 당장 해결해야 할 빵 문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그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육의 세계, 죄의 세계, 죽음의 세계를 넘어 영과 자유, 생명의 세례로 넘어올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지만 군중들의 귀는 철저하게도 막혀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한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빵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허기지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영원히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일 역시 오직 한가지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나누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메시아임을 굳게 믿는 일입니다. 그분의 가르침-복음-에 따라 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생명에 이르는 길-사랑의 길-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요한 6,24-35
+ 먼저 선택해야할 것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날씨가 더운 날 한 수행자가 절의 큰 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물었습니다. 동산의 선사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추울 때에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십시오.” 하였습니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더위도 추위도 없습니다. 쇠가 녹는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더위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으로 성장하는 또 다른 생명,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명을 먹여 살리는 육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열매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성당에 비유한다면 ‘매괴성모순례지성당’에 수난받으신 성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성모님은 서로의 용서와 화해, 사랑을 기억하게 합니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라는 호소를 받아들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를 지으려 공사를 시작했던 ‘성모광장’은 하느님의 권능이 우상숭배의 세력을 누른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치유와 기적에 호들갑을 떨지 않고 오늘 그 정신을 이어받아 믿음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은총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은총의 현상이 아니라 주시는 분에 시선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를 차지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하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복숭아를 따는 일이 급해 주일을 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권을 가지느냐에 나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할 지를 알려 줍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웰빙식품을 먹으려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썩어 없어질 빵과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성체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젊은이 알도 마르코치는 “어머니,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요? 성 필립보는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던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감실로부터 풍겨나오는 천국의 향기를 어떻게 네가 느낄 수 있겠느냐?” 성체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각적인 만족은 서로 상치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5,17)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먹다보니 발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저히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가면서 파리들이 말했습니다.
“한 순간의 달콤함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파리들이 맛있는 음식물이 들어있는 항아리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파리들은 스프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하는구나!
이제 곧 죽을 목숨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