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 무한 리필 생명의 빵(요한*6,51-58)

2012. 8. 19. 오전 10: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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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생명의 빵( 요한*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1-58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한없는 사랑을 성체성사를 통해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미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변화”, “영성체”. 예, 다 중요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성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변화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살아있는 미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거듭 태어나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성변화의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분을 닮고, 아니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체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체를 갈망하고 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야 하겠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내가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늘의 양식을 받아 모시면서도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셔도 아무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깊은 신심을 가지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8-29) 자신을 성찰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한 후 영성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13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하셨던 구엔 반 투안 주교님은 위장약이라고 쓴 꼬리표와 함께 작은 병에 담아 보내진 미사주와 습기를 피하도록 손전등 안에 숨겨 보내진 제병을 가지고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불사불멸의 약,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 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미사참례를 얼마나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미사참례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미사는 의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빵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성체를 단 한 번이라도 받지 못하여 그로부터의 혜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유리아노 예마르)

 영국의 위대한 총리대신 성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한 사람의 평신도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토마스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체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체질은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후천적 체질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음식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느냐 아니면 야채를 먹느냐에 따라서 알카리성 체질, 산성체질이 될 수 있고 몸 짱이나 비만형이 되기도 한답니다. 요즘은 특별히 웰빙식품을 선호하며 건강을 챙깁니다. 그러나 육적인 건강 못지않게 영적인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양식인 성체를 잘 모시는 사람은 성체체질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니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가없는 희생적 사랑을 살게 됩니다. 모름지기 향을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신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입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성체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잘 쓰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술에 취하지마라.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라. 모든 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라. 시간을 잘 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텔레비전 보는 시간보다 성경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하지 않겠어요? 술독에 빠지는 시간보다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시간을 챙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모든 일에 사랑을 담고, 일을 하고나서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은혜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순간 다른 것을 제쳐두고 미사를 봉헌하고 곧 성체를 모실 수 있음이 기쁨이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입니다. 한국에 오셨을 때 어느 인터뷰에서 테레사 수녀님은 “하루에 성체를 두 번 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 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소외받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하신 수녀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내 것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할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그곳에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이 모두가 거룩해지고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이라야 만날 수 있습니다. 매번 성체를 정성껏 모시고 성체를 모신 힘으로 행복하게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무르고”에 대해 생각합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머물렀다.”의 과거 얘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된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영성체로 “지상의 천국”(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가을이 오면   -

김용석-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성체의 신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꽃잎도, 꿀도 향기도 다 주었지만 정작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꽃은 노래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기뻐합니다. .
.나를 아낌없이 내어줄 때 나는 성장하고, 풍성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성체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몸과 피까지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나눔은 이천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지속되어온 힘이고 바탕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가 알아야 할 삶의 지향도 이것입니다.
작은 꽃이 자기의 향기와 꿀을 나누며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성체를 받아 모시며 예수님처럼 나를 나누며 살아갈 때 참으로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이기양신부)


<무한 리필 생명의 빵>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죽기 전에 세상 사람들 앞에 반드시 보여줘야 할 한 가지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에 절대로 다가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의 연속인 고달픈 이 한 세상이 지나가면,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또 다른 멋진 세상, 꿈에 그리던 행복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이 참담한 고통, 지금 우리가 감내하고 있는 이 깊은 슬픔, 잘 극복해나가면 정말이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란한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지상적인 것, 육적인 것, 눈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불멸하는 것,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해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 눈으로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성체 때 우리가 영하는 빵과 포도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 일생일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의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는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실 있습니다.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크신 하느님을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는 매일의 영성체를 통해 죄 투성이인 우리 몸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이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 인간이지만 매일의 미사를 통해 이 땅 위에서 영원한 삶의 참 맛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이토록 과분한 하느님의 선물이 매일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사막을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의 빵을 맛봤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공되는 생명의 빵은 무한 리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기만 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언제든지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빵입니다.


0   생명의 빵      

어떻게 자기 살을

유 광수 신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직면할 때가 있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 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더라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 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 주시기까지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자기들 살까지는 못 내어 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내어 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 다툼까지 벌였다.

우리도 학문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 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때로는 장상의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라고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한계 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한다.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참사를 당한 비행기 탑승객 유가족들이 사건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라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다. 이 세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내 생활의 장애물 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나의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 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우가 많이 있다.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 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서로 말다툼하고 갈라지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적어도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 장애 물 앞에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이 자기의 한계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식의 생활로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휠 씬 넓고 깊고 신비한 세계이다. 더군다나 영 적인 세계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한 세계를 향해 늘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보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놓으시는 그런 성체의 삶을 살 수 있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 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 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 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 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 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 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 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 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 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 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 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해의 폭이 좁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의 빈곤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깊은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우 리가 성체를 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간단할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도록 내 살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쌀이 밥이 되어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봄부터 농부의 수고와 벼들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도송이가 포도 가 되어 우리들이 마시게 되기까지에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포도송이가 우리 입에 먹혀지기까지에도 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견디어 낸 결실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 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8월 19일 미사 강론
 
일시 : 2012. 8. 19일(일) 연중 제20주일 새벽미사
강론 : 정 월 기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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