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영혼이 깨끗한 사람들

2012. 9. 4. 오후 6:45:16

글자
연중 제22주일/영혼이 깨끗한 사람들

0

영혼이 깨끗한 사람들

양 승국 신부

한 무리 관광객들이 단체로 소풍을 떠났습니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주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 한 가지는 그 버스에 커튼이 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나 대화주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상석에 앉힐 것인가?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가?

참으로 한심한 모습들이지요. 차창 밖으로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 논쟁만 계속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차적인 것, 지극히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정작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쉽게 놓치고 마는 인간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를 찾아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스런 하느님 얼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세상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만나 뵙고자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이나 본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바리사이들,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 진지한 자기반성이나 쇄신작업과는 담을 쌓은 율법학자들, 그래서 결국 빈껍데기뿐인 신앙인으로 전락한 유다인들을 엄중하게 질책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의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경고하십니다. 정결례는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에는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엄청 깨끗하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그래서 정결예식을 그리도 소중히 여겼던 유다인들의 행태를 바라보며 '정녕 깨끗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아침ㆍ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샤워를 빼먹지 않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일까요? 만만치 않은 비용을 감수해가며 매일 사우나를 가서 열심히 때를 빼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일까요?

마음은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는데, 몸만 깨끗하다고 어찌 그 사람을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면은 나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외면만 잘 닦고 광냈다고 어찌 그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안에서 깨끗한 사람은 내면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내면을 잘 다스리는 사람, 영혼의 정화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 마음을 잘 갈고 닦는 사람입니다.

묵상할수록 아름다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결국 우리를 지속적 영혼의 정화 상태로 이끕니다. 하느님 체험이 우리를 내적 자유에로 이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에,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 아무리 힘 있는 자들 앞에서라도 우리는 떳떳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분께서 머무실 때 그 어떤 혹독한 외부 상처로부터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속 생활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규칙들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을 향해, 우리 인간 동료를 향해, 그리고 우리 하느님을 향해 다가가기위해 발돋움하는 작업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7,1-8.14-15.21-23

고쳐야할 것은 마음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 했던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또 그들의 영성을 살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기도 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아울러 이번 태풍으로 많은 농작물피해, 재산 피해, 인명피해로 마음이 무거운데 복구 작업이 잘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요즘 묻지마 범죄와 어린이 성폭력문제, 성매매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반짝 떠들다가 또다시 반복되는 고질병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리고 원인치료를 위한 더 큰 사랑과 관심,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고 실질적인 노력을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한때 ‘바다 이야기’라는 사행성 게임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도박이나 주폭에 대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쉽게 일확천금을 벌고자 하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단속을 해도 교묘히 다른 방법을 찾아서 계속한답니다. 사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설령 손을 잘라도 도박을 하게 마련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을 사용하여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손 버릇 나쁘다’,‘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거친 손이 아닙니다. 사실 겉모양도 좋지만 마음 관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무엘 상권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용모나 신장을 보지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코린4장 5절에서도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7장9절에서 10절에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말씀입니다. 바르게 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오늘날 생각하면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 져 나가기 때문에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을 탓을 때 회복하기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게 되었습니다(레위기 민수기5장.9장.19장).

 

그런데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런 추세를 주도한 사람이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알맹이는 빼 놓고 껍데기에 매달린 것입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외적인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겉은 예쁘게 단장했지만 그 속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에 용서를 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 합니다. 아니 방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 천국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가 요즘 어려움을 겪으신 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가 가지고 있는 원본사진과 실물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젊은이들은 ‘너 방학했니? 너 방학 좀 해라!’ 한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방학동안 ‘고칠 것 뜯어 고쳐라’는 얘기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을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에 인간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을 고치면 얼굴도 달라지는데 마음을 고치지 않고 얼굴만 고치니 우습잖아요?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들랑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 12,14).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은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쇄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쇄신 이라고 다 옳지는 않습니다. 행해야 할 바른 쇄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 다시 말하면 알맹이를 찾는 것입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 9월 30일 주일 한가위 - 루카 12,15-21 +12.09.30조회 103연중 제23주일/귀먹은 사람은 듣게 하시고.(마르코 7,31-37 )12.09.08조회 80연중 제22주일/영혼이 깨끗한 사람들12.09.04조회 1,226피아골에서 온 편지 -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고별 강론12.09.03조회 61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12.08.26조회 57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 무한 리필 생명의 빵(요한*6,51-58)12.08.19조회 86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루카 1장 39-56절12.08.15조회 96연중 제19주일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41-51)12.08.12조회 1,155연중 제18주일/생명의 빵(요한 6,24-35)12.08.06조회 56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5)12.07.31조회 8147월22일 연중제16주일 - 마르코 6장 30-34절12.07.22조회 58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마태오 10,17-22)12.07.06조회 947월1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마르코 5,21-4312.07.01조회 82남북통일 기원 미사(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12.06.24조회 75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루카 1,57-66.8012.06.24조회 73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 마르코 4장 26-34절12.06.17조회 239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12.06.10조회 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