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 마르코 10장 46-52절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코 10,46ㄴ-52)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울면서 돌아오는 그들을 위로하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제1독서). 대사제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려고 뽑힌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대사제이시다(제2독서). 예리코의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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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실 것이다.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와 아이 밴 여인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사하도록 뽑힌 사람이다. 백성들의 죄와 자신의 허물 때문에 제사드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사제의 길을 걸으셨다. 하느님께서 사제직을 주셨던 것이다(제2독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기적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매달린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열정과 적극성이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의 기도는 보답을 받는다(복음).
사도 성 유다 타대오(Jude Thaddaeus) 10월 28일
오늘의 묵상
미국의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의 중증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녀는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장애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문필가이기도 한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별것 없어.’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헬렌 켈러는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어 이런 것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저녁이 되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노을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시각 장애인만큼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눈먼 거지는 얼마나 세상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눈먼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 소경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무능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어 그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고쳐 주신 것입니다. 눈이 멀쩡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축복에 대해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고 있는지요? 그리고 눈먼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과연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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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외칩니다. 사람들이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언제 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박했습니다.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병도 낫게 하시는 분이란 소문입니다. 그의 애절함은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를 불러오너라.” 주님의 말씀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을 뜬 바르티매오는 평생 ‘그 순간’을 간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감동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의 감동에 우리 역시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 내려졌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애절한 무엇이 없는지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그 어떤 일’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눈먼 이가 아니지만 영적으로 눈멀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면 누구나 영적으로 눈먼 이와 같습니다.
성녀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영적인 눈을 떠라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 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밀라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시각 장애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혼주례를 하면서 ‘육신의 눈 보다 영적인 눈을 뜬 가밀라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육적인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 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렇지만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5,31-46)에서도 최후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확실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루뭉실하게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셔도 기도의 열매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말씀드릴 수 있도록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 저는 당신께서 계시는 집과 당신 영광이 깃드는 곳을 사랑합니다. 제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편26,8-9).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선물을 주셔도 보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을 떠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1고린1,18)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르티매오와 같은 강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경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바르티매오는 사람들의 완래가 많은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구걸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지금 고정되어 있고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고는 자신이 갈 수가 없으니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있습니까?’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소경의 강한, 신뢰에 찬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으며 그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 크게 외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오너라.”라고 하십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이십니다.
그러자 맹인은 겉옷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그가 던져버린 겉옷은 구걸하기 위해서 앉아 있을 때 먼지를 막고
잠잘 땐 이불로 사용하던 그의 전 재산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저분이 나를 고쳐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가진 것이 적으니까 버리기도 쉽습니다.
부르심을 받고도 따르지 않았던 부자청년과 대조가 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시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당신을 따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서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뉘앙스를 지닌 말입니다.
정말 눈물 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에는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따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께 나아오면서 보여준 태도에서 그리고 확신에 찬 요구를 통해서
바르티매오의 강한 믿음을 확인하신 예수께서는
단순히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셨습니다.
참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곧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길을 갈 수가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뒤를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지만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예수께 구속된 것입니다.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들보다 더 낫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못 견디게 기뻐하나이다.” 하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도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그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 중에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시련에 놓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잘 돌아봐야합니다.
내가 당하는 시련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바르티매오가 보여준 확고한 믿음을 우리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굳게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는 것,
바로 부활하신 당신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때는 우리도 자신 있게,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하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이끌어 주십사 기원하면서
오늘의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양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관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