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이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며 주님으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사랑의 사도가 될 것을 다짐하며 마음 모아 미사를 봉헌합시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 요한 18,33ㄴ-37)
"You say I am a king.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환시를 본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분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전권을 위임받는다(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신 분으로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시다(제2독서).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란죄로 빌라도에게 고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심문하는 빌라도에게 당신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속적인 임금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시려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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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예언자는 환시 가운데에서 종말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심판주의 모습이 ‘사람의 아들’처럼 보였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전권을 위임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의 이 기록을 당신에게 적용시키셨다.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죽음으로 구원해 주셨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는 그분을 거역한 모든 이가 가슴을 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제2독서). 빌라도는 예수님 시대의 총독으로, 로마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이해하지 못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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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인 1970년대, 많은 이들이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를 좋아하며 불렀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중 일부는 이렇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텅 빈 얼굴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 우리와 함께하소서.
이 노래는 예수님의 모습을 왜곡한 기득권층을 비판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금관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와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으로 말미암아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예수님께 금관을 씌워 드리는 것입니다.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며 권력에 기대어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한 몸을 던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을 우리의 임금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임금은 가난하게 사신 임금, 남을 섬기신 임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임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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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당신 나라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세상의 개념’으로 그분을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은 ‘주인이신 예수님’으로 고쳐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의 주인이신지요?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십니다.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인이신 그분만이 아십니다. 우리의 운명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며 맡겨야 합니다. 교회 달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는 공적으로 이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분을 시간과 운명의 주인으로 다시 고백합니다.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느낍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시련을 누군가 막아 준다면 아무라도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부적을 지니고 굿을 하며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이러한 ‘방황’에 대한 교회의 ‘공적인 답변’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주재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미래를 책임지고 계심을 잊고 있었다면, 오늘은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운명을 지켜 주고 계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오늘은 느낄 수 있게 해 주시라고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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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외 아드님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잉태 소식이 전해지는데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1,32-33)
또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와서는 헤로데 왕에게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 하고 묻습니다. 깜짝 놀란 헤로데는 자기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태어났다는 말에 2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는 참상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체험한 백성들이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6,15)
오늘 복음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의 임금이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네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얘기해준 것을 말하는 것이냐고 하시며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지만 이 세상의 왕들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고, 왕관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굿간을 벗삼아 오셨고, 조롱섞인 가시관을 쓰셨으며 화려한 궁궐은 고사하고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분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기를 홍보하고 과시하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기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분은 사랑에서 당신을 비우신 분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과오가 아니라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도 자기가 최고의 지도자라고, 스스로 왕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행사하려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왕의 모습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로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고 내세우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이미 왕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고 한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 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요한13,15)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시며(요한13,34)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백성들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18,3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본당의 사목목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호소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과 더불어 주님의 모든 것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102가지 이야기} 르크리얀스의 국왕 자로가크는 백성들의 풍기가 날로 문란해져가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잘 들어라! 누구를 막론하고 풍기를 어지럽히는 자는 그 형벌로 두 눈을 빼겠다. 그러니 백성들은 문란한 행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조심해 주기 바란다." 그 후로 로크리얀스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잘 지켜 나라 안의 질서가 잡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이 신하들 앞에서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왕자가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왕자라 할지라도 일단 국법을 어긴 이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법대로 하겠으니 당장 왕자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라!" 마침내 왕자는 국왕 앞에 불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자로가크 국왕이 서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왕자라 할지라도 국법을 어긴 이상 마땅히 형벌을 받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도리이니라. 어서 왕자의 눈을 빼라!" 설마 하던 신하들은 왕의 추상같은 명령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아니옵니다. 아무리 국법이 엄하다 해도 단 한 분뿐인 왕자님께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은 이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옵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이번만은 왕자님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 많은 신하가 공손히 엎드려 국왕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국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정한 법은 누구나 다 지켜야 한다. 왕자라고해서 특별히 용서하고 왕이라고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이 법을 지키겠느냐?" 국왕의 표정은 엄숙하고 결심은 굳었다.
신하들은 더 이상 왕자를 위해 나서서 간할 수가 없었다. "자, 국법대로 시행한다. 집행관은 어서 왕자의 눈을 빼도록 하라." 집행관은 어쩔 수 없이 칼을 치켜들고는 국왕의 명령대로 왕자의 한쪽 눈을 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집행관이 다시 왕자의 다른 쪽 눈을 빼려고 칼을 고쳐 잡자 자로가크 국왕이 손을 들어 중지시키며 말했다. "집행관 듣거라! 법대로 두 눈을 다 빼야 하겠지만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 왕이 두 눈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그러나 자식의 교육을 잘못시킨 내가 아비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나의 한쪽 눈을 빼도록 하여라!" 신하들은 모두 놀라 반대했고 왕자도 국왕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페하, 그건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옵니다. 제발 명령을 거두워 주십시오." "아바마마, 차라리 소자의 눈을 빼십시오." 그러나 자로가크 국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집행관, 어서 내 눈을 빼도록 하라."
집행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명령이 엄해도 차마 국왕의 눈을 뺄 수는 없었다. "어서 명령대로 시행하라." "폐하, 소인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명령만은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집행관은 그 자리에 엎드려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도저히 명령이 시행되지 않을 것 같자 국왕은 스스로 칼을 움텨잡았다. "그럼, 내 손으로 시행하지!" 자로가크 국왕은 자신의 손으로 한쪽 눈을 뺐다. 그 후부터 로크리얀스의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국법을 잘 지켜 나라가 매우 안정되었다.
자식의 한쪽 눈을 빼서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자신의 한쪽 눈을 빼 자식과의 사랑을 유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세상이 추구하는 소유와 권력, 지배의 왕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진리와 정의의 왕, 섬김과 봉사의 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세상의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다음 주는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대림절을 잘 맞이하시고 기쁜 성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흔 무렵 세상을 떠난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임종 후에 베개 밑에서 편지가 한통 발견되었는데, 홀로 남게 될 남편에게 남긴 글이었습니다. 부인의 미련과 아쉬움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안타까움에도 또 다른 삶을 확신하는 그 깊은 신앙이 부러웠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먼저 떠나서 당신께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어요? 무책임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먼저 떠난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주님 나라에 먼저 가서 좋은 곳에 자리 잡고 기다릴게요. 당신께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해요."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어요? 주님 나라에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라는 말이 하루 온 종일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승을 떠나는 것이 정녕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냐는 그 마음, 이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을 확신하는 부인 유언에서 참 신앙인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나 갯바위 끝에 설 때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세상 끝에 서서 한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지금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바다 건너에 또 다른 대륙이 자리 잡고 있겠지? 마찬가지로 이 고단한 이승 삶을 건너가면 반드시 또 다른, 더 나은 삶이 새롭게 시작되겠지, 결코 여기가 끝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갑자기 가슴이 훈훈해져 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부드러워 집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끝, 삶의 막다른 골목은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길목이 아닙니다. 인생 종치는 날도 아닙니다. 어쩌면 희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출발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런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해주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비록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파도가 높기만 할지라도, 극심한 고통에 힘겨운 나날을 보낼지라도 절대로 낙담하지 말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며, 언젠가 주님께서는 축복의 잔으로 변화시켜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기에 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 다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희망의 들판으로 다시 나가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니 '생활 속의 복음' 원고를 쓰기 시작한지 만 3년이 지났습니다. 마지막 원고를 보내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오래 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날 이리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 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원고를 쓰자니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좀 더 노력할 걸, 좀 더 고민할 걸, 좀 더 진지했어야 했는데, 내가 아니라 주님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부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간 나름대로 일상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흔적을 찾아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회를 주신 평화신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운 제 신앙 나눔에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던 독자 여러분께도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이 내리친다 하더라도 세상이 끝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두운 하늘 그 너머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찬란한 태양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고통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실패만 거듭된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 저 너머에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주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이승살이에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기 위해 환한 얼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 당신은 왕이시옵니다. 아멘.
수년 전에 어느 수녀원에서 부활성야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사를 드리기 며칠 전에 전례를 담당하시는 수녀님이 저를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
"신부님, 저희 수녀들은 독서를 다 외워서 독서책을 안보고 암송하는데, 신부님도 복음을 미리 외워서 복음책을 안보고 암송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그런데 저는 부끄럽게도 "저는 못해요...저의 친정(?) 전화번호도 못 외우는 머리로 도저히 복음을 외울 수가 없답니다...."라고 수녀님께 통사정을 하여 관면(?)을 받았습니다.
그 부활성야미사에서 수녀님들은 도대체 몇 달 전부터 그 긴 독서들을 다 외웠는지, 토씨 한두개 정도 틀리고 거의 완벽하게 독서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미사에서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미사내내 '도대체 그 성서암송의 비결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정된 기억용량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저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입력시키기 위해서는 영적바이러스가 될 불필요한 기억들을 과감하게 삭제하여 우리의 돌퓨터(?)의 용량을 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성서를 모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고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이른바 불가타 성서를 쓴한 성 예로니모는 다음과 같은 체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 예로니모는 젊었을 적에 오로지 세상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입신 출세하여 왕궁의 법정에 소속된 재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성지 팔레스타인을 순례했습니다.
그때 그는 베들레헴에서 가까운 사막에서 기거하며 기도를 하고 재를 지키며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어려운 일에 매달려 자신의 지난날을 속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아름다운 한 소년이 나타나서 두 손을 내밀었는데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듯한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소년이 입을 열자 예로니모는 그가 곧 소년 예수님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야 내게로 돌아온 네가 그 동안에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 저의 마음과 저의 사랑을 전부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미흡한 듯이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저의 모든 재능을 보속으로 바치겠습니다. 또 무엇을 당신께 드려야 합니까?"
예로니모가 다시 말하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난 너의 모든 죄를 내게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는 죄없이 깨끗이 살기를 바란다...." >
아마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로니모의 죄를 '내 머리속의 지우개'로 깨끗이 삭제해주시고, 그의 영성과 영적용량을 무한대로 넓혀주셨나 봅니다.^^*
참고로 불가타(Vulgata)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어 있다' 라는 뜻으로,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다시 정정한 것입니다. 이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습니다. 그리고 1907년 성 비오 10세 교황은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고 새로운 개정판을 촉진하였습니다.
한편 성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담은 책이며, 구세사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문자로 기록한 하느님의 책, 교회의 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구원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약속을 담은 계약의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그 구원의 약속을 확인하고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을 간직하고 키워나가게 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분은 인간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데서 비롯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친교를 이루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준비한 하느님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구원, 그리고 그 백성과 맺은 관계가 바로 구약의 핵심 주제입니다.
신약은 하느님 당신이 정한 때가 이르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와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 역사입니다. 이 새로운 계약이「새 계약」, 곧 「신약」입니다. 정경으로 인정된 성서는 구약성서 46권, 신약성서 27권 등 총 73권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성전, 교도권과 함께 계시의 3원천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왕의 왕자, 공주임을 후천적 망각증(?)으로 잊지않고 잘 기억하도록 도와주며 또 우리의 신분을 보증하는 계약서이지요. 성령의 감도로 씌여진 이 성서는 역시 성령의 비추임을 받아 읽으며 또 그 말씀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성서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성서묵상법으로 널리 알려진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4가지 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Lectio(읽기)
2. Meditatio(묵상하기)
3. Oratio(기도하기)
4. Actio(실천하기)
따라서 렉시오 디비나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읽고 되새기는 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명확히 깨닫고, 또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 말씀으로 기도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성전 즉 몇몇 교부들의 말씀을 퍼드립니다.
*"침묵 속에 숨어 계시던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로 나오셨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름을 지닌 위격이 되셨다. 또한 하느님의 거울이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셨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주교)
*"이제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메아리치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우리는 성찬례에서뿐 아니라 성서 독서중에도 역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 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의 몸에 다가가듯 성서에 다가가야 한다."(성 예로니모사제)

성서주간을 시작하며…
-장광재신부-
제가 신학생 때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성서주간을 시작하며 교우들에게 성경을 매일 한 장씩이라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맨 뒤에 성경을 구입한 날을 기록하고 성경을 다 읽은 다음에도 그 날짜를 기록해서 자신이 성경을 얼마나 자주 보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성경을 못 읽고 잠자리에 들었을 경우에는 힘들지만 이것만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에 입맞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 자주보고 자주 만지며 입맞춤을 한다면 성경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저절로 우러나올 것입니다.
이번 성서주간을 맞이하며 부모님은 자녀에게 다 큰 자녀들은 연로하신 부모님께 나이에 맞는 성경을 선물하는것은 어떨지요!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한번은 이런 묵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당과 지옥에 가는데 그걸 하느님께서 직접 심판하실까? 물론 그러실 것입니다.
어느 피정에서 강사 수녀님은 길을 자주 잃어버리시는데 나중에 죽어서도 천국 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기도서에 있는 성인 호칭기도를 자주 바치고 있었고, 자신이 죽으면 매일매일 기억했던 성인성녀들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천국 가는길을 안내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체험 덕분으로 오히려 믿음이 더 깊어지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저도 심판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은 살면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익숙해졌기에 죽어서도 그를 부르는 두 가지
(악령과 성령) 소리에서 분명히 성령의 소리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곳이 곧 천당이겠지요. 반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 세상의 가치대로 산 사람들은 죽어서도 자신에게 익숙한 소리 곧 악령의 소리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이겠지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하느님의 심판도 있겠지만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왕이시옵니다…
1년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기뻐하시는 당신, 고통스러워하시는 당신, 안쓰러워하시며 눈물 흘리시는 당신, 미소를 머금고 저희를 바라보시는 당신. 그런데 주님, 당신의 이런 모습이 바로 제 이웃의 모습이었고 가족의 모습이었으며 먼 이웃 나라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1년 12달, 주님은 언제나 부족한 저희와 함께 하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마구간을 택하셨고 40일간의 단식과 유혹을 겪으셨으며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 안으셨고 저희의 구원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저희를 위해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전례주년의 마지막 주간을 맞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당신께 드릴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