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회개촉구(루카 3,1-6)

2012. 12. 9. 오전 8:16:05

글자

2012년 12 9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현시대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1-6)

 이재경 요한 신부님 강론

        96

말씀의 초대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위로하고 있다.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고 의로움의 겉옷을 입으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의로운 이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없다.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의 열매가 그들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친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회개는 새로운 변화다. 지난날의 잘못을 뛰어넘어 또다시 도약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뉘우치기만 하는 것은 회개의 반쪽 행위에 불과하다. 새롭게 시작하고 다시 출발해야 진정한 회개가 된다(복음).

 바룩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위로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예루살렘을 영광의 빛 속에서 이끌어 주시리라고 말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어서 기뻐한다. 그는 신자들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풍부해져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기를 바란다(제2독서).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 받고 요르단 지방을 두루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밀레의 ‘만종’(晩鐘)은 널리 알려진 그림입니다. 저녁에 저 멀리 있는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감자를 캐던 부부가 일손을 멈추고 삼종 기도를 바치는 그림입니다.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저녁은 마음이 바쁜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그 종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드린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부의 모습 자체는 그리 큰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엄숙하고 거룩하게만 보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르단’이란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내려다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거나 억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거룩해지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인간의 품위가 회복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남의 이목을 끌 만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소박하게 살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함이란 바로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입장에서 행할 때 드러날 수 있습니다.

 

☆☆☆

 

대림 시기 두 번째 주일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회개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본질에 가깝습니다. 뉘우침은 새 출발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고자 아파하는 것이지, 자신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뉘우침만을 붙들고 온통 그쪽에만 신경 쓰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새 출발을 위한 ‘성찰’입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반성’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소홀히 하였기에, 열심히 회개했지만 새 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집착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역시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주님의 힘’이 물질의 힘보다 강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의 힘’이 돈의 위력보다 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실천입니다.
믿음과 신뢰는 언제나 ‘내 쪽’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이 먼저 믿고 베풀면, 결국은 사람 사이의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호해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속이고’ 거짓말하더라도 신뢰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용기입니다.

 ☆☆☆

그리스 말로 ‘회개’란 단어의 본디 의미는 ‘뒤를 돌아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지에 대한 물음엔 선뜻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열심히 산다고 하는 사람부터 마지못해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까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목표는 나름대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나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채워 줄 만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이내 허무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왜 살아가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달린다. 그러나 길이 아니다.”라는 라틴 말 속담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은 위험천만할 수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스스로 왜 달리는지 그리고 어디로 달리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잘 달려 보아야 무의미한 달리기가 될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다주며, 그동안 간과했던 삶의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허영엽 신부-

 

주 월요일이면 명동대성당 교육관 강의실은 열기를 띱니다. 성서못자리 공부를 위해 서울은 물론 멀리 춘천, 원주, 대전 등에서 새벽을 달려오는 신자들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휴일마저 반납한 성서못자리 강사 신부님들의 열의 또한 대단합니다.

오랫동안 성서못자리 저녁 강의를 맡은 한 후배 신부가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저는 매주일 유혹에 빠집니다. 그리고 회개를합니다. 월요일이 되면 항상 오늘 하루 그냥 푹 쉬고 싶은 유혹이 늘 생깁니다. 그래도 저녁때가 되면 억지로 마음을 고쳐먹고 신발끈을 동여매고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싣고 명동대성당을 향합니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저를 쳐다보는
수강생들의 또랑또랑한 눈이 내 의식을 깨워줍니다. 피곤하면서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는 신자들의 모습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둠이 깔려있는 늦은 밤 본당으로 돌아갈 때면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깃털처럼 가벼워 날아갈 듯 기쁩니다.
이제 사제로 말씀을
선포하는 기쁨을 아주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월요일에도 또 유혹이 오겠지 생각합니다.”

대림시기는 회개와 기다림의 기간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좁은 의미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마음과 정신, 행동의 변화가 앞서야 합니다.

회개의 삶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욕심과 고집을 버리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자기 것을 내어 주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또한 회개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것 또한 회개의 자세입니다.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대림기간동안 우리의 손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발은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데 더 부지런해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입은 불만불평보다 칭찬과 평화를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을 불어넣어 주시기위해서입니다.

세상의 것에 기대하지 않고 영원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바뀌고 변화하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사람, 영원한 삶에 대한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은 욕망이 아니라,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2주일입니다. 대림 초 두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패인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명,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에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에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에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어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하십시오. 시기와 질투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 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기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1,10-11)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되길 바랍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부인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신앙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아내의 손에 있는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어디 네 성경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난로 속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딱 들어오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4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있는 말씀에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는 말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교부 떼르뚤리아노는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죽는 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수도자라고 해서 다들 ‘에프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저 같이 적당, 적당히 사는 날 나리 같은 수도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 수도자다운 형제들을 봅니다. 본업은 당연히 복음 선포요, 사목활동입니다. 취미는 기도생활입니다. 특기는 공부입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형제들의 영적생활의 향상이나 수도회의 쇄신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역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잘 살까?’입니다.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고집하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 수도회가 쇄신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양한 눈요기 거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멀리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메뚜기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곤충입니다. 날개 떼어내고, 머리 떼어내고, 다리 떼어내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맛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식물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영양가가 없는 음식, 풀과도 같은 거친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들꿀 역시, 요즘 말하는 값비싼 석청이 아니라 당시 가장 소박하고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메뚜기와 들꿀이란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은 단순한 금육이나 검소한 식생활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지고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오시는 예수님께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평생 추구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세례갱신운동은 군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여긴 걸로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당시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즉시 이렇게 증언하며 크게 물러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당시 노예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 수십 번도 더 신발 끈을 묶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신발 끈 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니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두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 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 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평생 예수님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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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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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4주일. 말씀을 믿으신 분!”(루카 1,39-45)12.12.23조회 60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나누어 주어라. (루카 3,10-18)12.12.16조회 591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회개촉구(루카 3,1-6)12.12.09조회 61대림 제1주일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12.12.02조회 57연중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 요한 18,33ㄴ-3712.11.25조회 1,300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 마르코 13,24-3212.11.18조회 271연중 제32주일-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12.11.11조회 56연중 제31주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12,28ㄱㄷ-34)12.11.04조회 56연중 제30주일/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46ㄴ-52)12.10.27조회 952012년 10월 21일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12.10.21조회 55‘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김영남 신부12.10.12조회 58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마르코10,2-1612.10.08조회 56+ 9월 30일 주일 한가위 - 루카 12,15-21 +12.09.30조회 103연중 제23주일/귀먹은 사람은 듣게 하시고.(마르코 7,31-37 )12.09.08조회 80연중 제22주일/영혼이 깨끗한 사람들12.09.04조회 1,225피아골에서 온 편지 -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고별 강론12.09.03조회 61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12.08.26조회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