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 마르코 13,24-32

2012. 11. 18. 오전 7:37:04

글자

 

2012년 11 18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기념 없음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며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고 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마르코 13,24-32) 

"Learn a lesson from the fig tree.
When its branch becomes tender and sprouts leaves,
you know that summer is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he is near, at the gates. 


 

말씀의 초대

종말이 올 때 하느님 백성의 보호자인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하느님 백성 가운데 의롭고 충성스러운 이들은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제1독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당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이 가깝거나 멀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늘 대비하는 것이다(복음).

☆☆☆

종말의 날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주님의 사자로 등장할 것이다. 그와 함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이 있을 것이다. 다니엘 예언서는 이렇게 종말의 날을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의 별처럼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한다(1독서). 사제들의 제사가 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이의 죄를 없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누구나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신다. 죄악이 구원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2독서). 종말의 날에 대한 마르코 복음의 기록이다. 그날 해는 어두워지고, 달과 별들은 빛을 잃을 것이라고 한다. 해와 달과 별들에 해당될 만큼 중요한 것들이 변화를 겪을 것이란 말씀이다. 삶의 변화에 대비하는 것이 종말에 대한 준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 비오 10세 교황은 추기경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은 가톨릭 학교 설립이나 성당 신축이나 사제 양성이 아니라 각 본당마다 사도적 정신이 투철한 평신도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주일’인 오늘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사제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에서는 “사목자의 임무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그 본래의 임무이다.”(6항 참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적 정신을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건강해집니다. 평신도들을 양성하여 사도적 정신을 꾸준히 길러 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평신도의 고유한 특징은 세속적인 성격에 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평신도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수행합니다. 영국의 헨리 뉴먼(Henry Newman) 추기경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톨릭 정신의 잣대는 평신도였다.”고 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이 교회를 가꾸고 지켜 온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믿음과 순교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고마움을 기억하면서 평신도의 사명을 다시금 성찰하는 날입니다.

☆☆☆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진정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요? 말씀의 의도는, 미구에 닥칠 엄청난 변화를 이야기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해당될 만큼요지부동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바뀐다는 암시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는지요?
실제로 달도 변하고 태양도 바뀝니다. 자신이 변화되면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다르게 보입니다. 마음이 밝은 날에는 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마음이 어두운 날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종말 역시 이러한 삶의 변화입니다.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인생의 작품일 뿐입니다
.
그러므로 삶의 중간에서 종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인 무엇으로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종말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일입니다. 누가 인간의 삶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 저렇게살아야 종말의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며 거듭 태어날 것을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종말을 위한 가장 확실한 준비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돌아보니 우리네 인생이란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사이로 난 외길을 걸어가는 여행길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삶과 죽음 그 사잇 길을 걸어온 제 인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한번은 이쪽으로 다른 한번은 저쪽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결국 제 인생은 하느님 아버지의 가호가 없었다면 수 백 번도 더 사라졌을 위태위태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 삶은 하느님 자비의 결과임을 확신합니다. 


   요즘 와서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절망 속에는 반드시 희망이 감추어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슬픔 속에는 반드시 기쁨이 씨앗이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 안에도 반드시 찬란한 생명이, 영광스런 부활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삶 안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습니다. 또한 죽음 안에 삶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나온 한해 여러 사람들과의 작별이 있었습니다. 그냥 일시적인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이었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고 아쉬웠던 나머지 숱하게도 밤잠을 설치기도 했던 작별,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되지 않았던 작별, 짙은 슬픔만을 남겨주었던 작별도 있었습니다.

사별을 통해 남아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떠나감을 못내 아쉬워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축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우리는 덜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다. 죽음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덜 잘난 체 하며, 덜 떵떵거리며 살아갑니다. 


결국 죽음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축복인 죽음 앞에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오늘을 충만히 살아가는 일인 듯 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오늘"을 충만히 살아가는 일이 잘 죽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매일 우리의 어제를 남김없이 거두어 가시고 어김없이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선물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축복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과제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것들에 애닯아 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나의 나 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통해 하지 아니하며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 하며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전생애를 통하여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 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막판 뒤집기를 아십니까? 잘한 것이 없는 데 마지막에 한건 올려서 동안의 손해를 만회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별반 열심히 사신 것 같지 않은데 돌아가시기에 앞서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까지 모시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는 막판 뒤집기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동안의 삶이 어떠했든 마지막에 하느님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중에는 그것을 이용하시려는 분이 있으니 큰일입니다. 지금은 돈도 벌고 마음껏 즐기다가 나중에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해 한꺼번에 용서를 청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막판 뒤집기의 기회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13,27)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2). 결정적으로 우리는 선택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선택을 받는 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르고 내 마음대로 뒤로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의 때를 아무도 모르니만큼 늘 깨어서 할 일을 다하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1독서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고 했습니다. 결국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신다(로마2,6)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왜 어떻게 선택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다만 오래된 몸의 관습에 따라서 움직일 따름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말 위에서 잠들었을 때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생집으로 갔습니다. 잠들어 있는 상태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주인이 자기한테 맡긴 일이 무엇인지 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종과 같습니다(이현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 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마르13,24)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2베드로 3장13절~15절에서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을 두려워 말고 지금 이순간을 흠도 티도 없는 마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구원은 막판 뒤집기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 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말은 우리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일생의 의로움에 따라 천국이나 연옥,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 순간이 소중합니다. 그야말로 인생에 연습은 없습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다니12,3) 고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13,43)라고 말합니다. 오늘 나의 삶이 빛나는 삶이 되어야 나중에도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하십니다.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을 해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이웃으로서 지금 맡은 일에 충실하며 거룩한 생활에 마음 써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에 충실하길 기도 드리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생각하라.

네 지닌 영혼은 하나밖에 없는 것임을.

네 지닌 목숨이 짤다랗고

이것만이 네게 달린 것임을.


하나밖에 없는 영광, 그것이 영원한 것임을.

그제야 너는 많은 것을 버리리라.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에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이 모두를 얻으리라.


님을 모시는 이

님 하나시면

흐믓할 따름이라.



사랑합니다. 많이!

                    



 한 목사님이 술, 담배를 좋아하시는 신부님께
아니, 하느님 일을 하시면서 술, 담배를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시자

신부님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는 목사님은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개인적인 행복을 누리면서
어떻게 양들을 위해 일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가정을 가져 보지 않고 어떻게 신자들의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지 모르시는군요.
가정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

그러자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
그렇다면 그 큰 선물을 포기했는데 하느님께서 그깟 술, 담배도 못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합리화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습니다.

★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

-유 영봉 몬시뇰 신부-


 묵상길잡이 : 교회의 근본사명은 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 사명은 세상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평신도야말로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비출 수 있고, 진리의 소금으로 부패를 막을 수 있다.

1. 누가 평신도인가?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1970년부터 연중 마지막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 주일의 의의는 세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교회가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데 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많은 평신도들은 “신부님 수녀님이 계신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합니까?”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자세를 취하는 그 밑바탕에는 ‘평신도는 신앙심이 부족해서 세속을 끊지 못하여 수도자도 성직자도 못된 변변치 못한 신자’ 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이런 태도는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평신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신도(病身徒)이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생각과 태도야말로 깨끗이 떨쳐버려야 할 낡은 생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스스로 평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고 무책임하게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을 말한다”(교회헌장,31항)고 평신도의 직분과 사명을 명시하였다.

2.세속에 살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평신도.

만일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은 누가 수행할 것인가?

수도자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을 통해 현세적 가치들을 뛰어넘어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증거 한다. 그리고 성직자는 말씀의 선포와 성무 집행을 통해 신앙의 씨를 뿌리며 신앙인들을 키우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다리가 되어 준다.

평신도들은 세속에 그 삶의 바탕을 두고 있는 이들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들이다.

집을 짓는데 설계도 중요하고 기둥도 중요하지만, 벽돌로 모든 공간을 쌓아 막지 않으면 건물은 완성될 수 없다. 평신도는 바로 건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수많은 벽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수도자가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

한국교회는 참으로 평신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가꾸고 지켜온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두 분의 중국 사제가 잠시 활동했을 뿐, 50여년을 평신도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박해 중에 교회를 이끌고 가꾸었다. 유요한과 이 누갈다 동정부부 순교자의 생애는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어려운 사회여건 속에서도 맹렬한 활동을 한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5천리 북경 길을 아홉 차례나 왕래한 정하상(바오로)성인,16세에 장원급제하여 임금과 뭇 사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하느님을 알고는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쓰레기처럼 버린 황사영(알렉산델) 등 우리 선조 평신도들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교회가 조직이나 구조적으로 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깨어 활동하는 평신도들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내가 바로 교회이다.”는 자각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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