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41-52)

2012. 12. 30. 오전 8:32:34

글자


2012년12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41-52)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제정된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진정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부모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고 우리의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줄 것이다(제1독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서로를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다. 또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의 부모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 성전에서 그를 발견한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내셨다(복음).

☆☆☆

 

부모의 훈계를 경청하는 자녀는 복을 받는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녀를 통해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버이가 나이 들면 잘 보살펴야 한다. 부모에 대한 효행은 죄를 상쇄하는 일이다. 부모를 섬기면 분명 축복이 함께한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노인을 업신여길 수 없다(제1독서). 용서는 예수님을 본받는 행위다. 용서하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 이에게는 주님의 평화가 머물 것이다. 자신이 평화스러워야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계신 예수님을 찾아낸다. 성모님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성가정을 이루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가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무엇인지요? 온 가족이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자녀들이 속을 썩이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이 성가정일까요?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은 두루 갖추어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받고자 하는 나자렛 성가정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성가정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에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불행의 여건을 많이 갖춘 가정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막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막일꾼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이 가정은 혼인하기 전부터 부부간에 오해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오해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은 자식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불행의 여건을 두루 갖춘 가정을 본받아야 할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교회가 성가정을 본받자고 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가정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자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분명 인간적인 불행의 여건을 많이 지녔으면서도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가정은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순간에 가정 한가운데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요즈음 많은 가정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입니다. 지금 우리 가정의 중심에는 누가,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요?

☆☆☆

 

성가정은 거룩한 가정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함께 사셨기에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세 분께서 ‘사셨다는 이유’ 때문에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세 분께서 ‘성가정의 사람답게’ 사셨기에 그렇게 부릅니다. 어떤 삶이 그것이겠습니까?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불화가 생기면 성가정에서 탈락되고 화목 속에 살아야만 성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 없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갈등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면 모두가 성가정입니다. 가족이 주는 아픔을 ‘주님의 힘’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성가정은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매고 다니셨습니다. 성전에서 자식을 무사히 찾아 안도하시면서도, 예수님의 대답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게 될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이 점점 실현되고 있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칼에 꿰찔리는 아픔으로 봉헌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자식은 한동안 부모의 마음을 찌르는 ‘칼날’이 됩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부모는 가슴에 ‘멍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받아들입니다. 부모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가정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 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 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이혼율이 늘어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콜로새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3,15.16)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가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서 사촌이 되고 대학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인가 가정인가


 집 벽은 나무로 세워진 것
그 기초는 벽돌이나 돌로 세워진 것.
그러나 가정은 오직 심장의 고동들로 세워진 절묘한 것.

집 값은 즉시 매겨지고
한 덩어리 금덩이로 치를 수 있으나
가정의 값을 계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 가격을 말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네.

 집의 방들은 품위 있고 호화로우며
그 장식이 예술적 업적인지 모르나
가정의 아름다움은 사심이 없는 마음의 노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결과들이라네.

 집은 불탈 수 있고 팔리거나 바뀔 수 있는 것
집안의 조화를 잃어버리기까지 간섭할 것은 아니지만
가정을 잃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짓밟혀질 것인가!
우리의 가정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

 많은 행운으로 여러 집을 가진 사람은
그의 재산이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속한 가정에 사는 사람은
참된 백만장자로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네(J.H 사이크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루가 2, 41-51 /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강론 :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많이 사용한 단어는 "찾다"라는 동사이다. 그런데 매번 상황이 달랐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잃어버린 예수님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해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여기 저기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세 번째는 찾아 헤매다가 사을 만에 잃어버렸던 예수님를 찾고 기쁨과 감탄해하는 모습이다.
네 번째는 잃어버렸던 예수님를 찾은 후에 그 예수님과의 대화하는 장면이고,
다섯 번째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잃었던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그 단계적인 영성생활의 단계를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은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찾아 나서고  찾았으면 그분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이는 부모를 찾아 나서고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자식을 찾아 나선다. 엄마 찾아 삼만리 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까지는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고통스럽다. 아우구스띠노도 "하느님을 찾기전에는 내 마음이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을 잃어버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간은 하느님을 찾아 헤매고 있다. 잃어버린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마치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 나서는 어린이와 같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나서는 모습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을 대변하는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지를 예수님의 부모님들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는 표현에서 그 고통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 62, 2)

인간의 이 방황은 그리고 이런 인간의 불안은 하느님을 찾았을 때에 비로 서 끝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영혼의 모습을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주여, 잘난 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사옵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시편 130)

그렇다면 하느님이 인간을 떠났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인가? 우리는 다음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셨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은 늘 있어야 할 곳인 아버지의 집에 계셨다. 예수님을 두고 떠난 것은 그의 부모님들이셨지 예수님이 부모님을 떠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하느님을 떠났지 하느님이 인간을 떠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알라보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때도 누울 때도 환히 아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앞뒤로 이 몸을 감싸 주시며, 내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시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 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 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 138, 1-8 참조)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다시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하룻길을 지난 다음에서야 예수님이 안계신 줄을 알고 찾아 나섰듯이 하느님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것이 영적 여정이다. 우리는 이 영적 여정을 걸으면서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다시 찾아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았으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한결 자유롭고 평화로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늘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비록 다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늘 하느님의 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풍요로울 것이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동
은, 탐구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말씀을 다 못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품은 말씀이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을 줄 것이며 그 말씀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 들어갈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마음속에 품은 그 말씀은 영원히 샘솟는 물처럼 솟아올라 올 것이다.
아마도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늘 마음속에 품고 사셨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즉 말씀을 늘 간직하고 생활하신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성모님의 성심이 되었을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화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라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고생하며 무거운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 하느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늘 우리는 불안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을 보면 대략 5가지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자기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삶의 기쁨도 의미도 없는 체 살아가는 사람이다.

둘째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찾아 나서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을 구도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을 찾아 나서고, 권력 찾아 나서고, 쾌락을 찾아 나선다.

셋째는 하느님을 찾아 나섰지만 아직까지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헤매듯이 하느님을 찾고 있는 사람이다.

네 번째는 하느님을 찾아낸 사람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대화를 하고 기쁨에 넘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하느님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고요와 침묵 중에 말씀을 되새김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다른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의 에게만 전력투구하는 사람이다.
마음에는 늘 기쁨이 솟아나고 마음이 평화로우며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사는 사람이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습니까?"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고 늘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곳이 아버지의 집이요,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이런 생활이 이미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리라. 이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우리의 영적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 나의 영적 상태는 어느 지점에 까지 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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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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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마태오 2,1-12)13.01.06조회 602013년 1월 1일 화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루카 2,16-21)13.01.01조회 61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41-52)12.12.30조회 55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요한 1,1-18)12.12.25조회 58대림4주일. 말씀을 믿으신 분!”(루카 1,39-45)12.12.23조회 59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나누어 주어라. (루카 3,10-18)12.12.16조회 591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회개촉구(루카 3,1-6)12.12.09조회 60대림 제1주일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12.12.02조회 57연중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 요한 18,33ㄴ-3712.11.25조회 1,299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 마르코 13,24-3212.11.18조회 271연중 제32주일-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12.11.11조회 56연중 제31주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12,28ㄱㄷ-34)12.11.04조회 56연중 제30주일/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46ㄴ-52)12.10.27조회 952012년 10월 21일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12.10.21조회 55‘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김영남 신부12.10.12조회 58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마르코10,2-1612.10.08조회 56+ 9월 30일 주일 한가위 - 루카 12,15-21 +12.09.30조회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