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루카 3,15-16.21-22)

2013. 1. 13. 오후 2:43:19

글자

2013년 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고자 제정되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로써 단지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탄생의 세례로 격상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녀로서의 사명을 상기하도록 합시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15-16.21-22)


 


 

주님세례축일 강론

말씀의 초대

바빌론 유배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종을 파견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그 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새 계약을 이룰 것이고, 모든 민족들은 구원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제1독서). 베드로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곧 할례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 계약이 맺어지는 것이다(제2독서).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다. 물의 세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도유가 되며, 죄의 용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선포된 것이다(복음).

☆☆☆

 

주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종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일을 시키실 것이다. 그는 민족들의 빛이 되실 분이시다. 갇힌 이들을 풀어 주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해방을 알릴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영을 보내시어 계속 그를 돕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코르넬리우스는 백인대장이다. 로마 군인 백 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우두머리이다. 그런 그가 베드로를 초대하여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베드로는 모든 민족들을 선택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제2독서).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를 위한 준비였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는 그분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어느 자매의 신앙 수기에 있는, ‘평화방송’에서 들었다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 놓고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상이 나올 때까지 부엌에서 애꿎은 아궁이만 휘젓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이 굶어도, 병들어도, 월사금을 못 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고, 식구가 너무 많은 탓이고, 피난살이하던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설움이건만, 유독 어머니는 모든 것이 늘 당신의 죄 탓이라고 하셨지요.
이제 그때의 어머니의 나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은 법이라는 말은 법률적 논리나 윤리적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논리 안에서는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당신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세례란 씻는 예절입니다. 요한은 실제로 요르단 강에서 온몸을 씻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마에만 물을 붓습니다. 상징적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세례의 핵심은 죄를 끊고 악습을 씻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의 자녀로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례성사의 본질은 ‘내적 변화’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 몸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기운이 좀 더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은총의 이끄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사랑’으로 단순화하셨습니다. 그분 가르침에 따르면, 죄는 ‘사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생활을 말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런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하늘의 힘’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탄생입니다. 올해에도 세례 때의 은총을 기억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베푸는 삶’의 실천입니다. 누구라도 베풀면 받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

 지도자는 자신을 높일수록 권위주의적이 되고, 자신을 낮출수록 권위를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릴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시고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죄인들에게나 필요한 물의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십니다. 이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권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곧 주님의 한없는 겸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의 모습을 봅니다.
권위에는 사회적 권위, 문화적 권위, 관계적 권위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권위는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에 비례하지만, 그 직분을 상실하면 곧바로 소멸하는 유한한 권위입니다. 문화적 권위는 한 사회 안에서 문화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권위로서, 교직자나 성직자들의 권위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그 위치의 본질성에 따른 권위로서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계적 권위는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와는 상관없이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부여되는 권위를 말합니다. 이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인정하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권위를 가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본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관계적 권위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창조주이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한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거룩한 공생활이 시작됨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신 이 거룩한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우리는 세례 때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을 다짐하며 주님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세례의 의미 

반영억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깊은 산 속에서 산나물을 캐던 칠순 할머니가 산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어여쁜 아가씨로 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 온 그는 늙은 영감에게 이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니, 자기도 젊어지겠다고 일러준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욕심을 부려 지나치게 퍼먹었는지 갓난아기로 변해버렸답니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삶이 바뀌지 않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산다면, 언제까지나 갓난아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조금도 성숙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란 날로 짐스럽고 힘들어만 가며 신앙은 결코 달고 가벼워야 할 사랑의 짐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행세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웃이야 어찌되든 자기 욕심만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2절에 ‘두 아들의 비유’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는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 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삶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것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포기와 버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
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서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 보다 더 은혜로운 날입니다.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표징으로 새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술 좋아 하는 사람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모이겠어요? 노름 좋아하고 화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유상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매력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와 미사참례를 즐겨하고 전교를 기뻐하며 성경공부를 그리워하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정철’이라는 분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요?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새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으신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거듭나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생활 안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 안에 항상 거듭나야 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습니까?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구의 모태성당에서도 정초를 맞이해서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신천지’에 기웃거리는 사람, 이미 발을 담그고 다른 사람을 한 번 와보라고 유혹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는 한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고 늘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당 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소금역할을 하는 3%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은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티토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티도3,4-5)
사랑합니다.


 

성령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

- 홍승모 신부-

 

 

오늘 전례는 주님이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에 따르면 요한 세례자는 세례를 준 사실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요한 세례자가 옥에 갇히는 상황을 전합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요한 세례자는 과연 어떻게 주님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는지 의심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요한 세례자가 주님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문제는 요한 세례자가 옥에 갇힌 이후에, 하필 주님의 세례를 언급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 달리, 루카 복음은 주님이 복음 선포를 시작한 시기가 요한 세례자가 옥에 갇힌 이후가 아니라, 세례 이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곧 루카 복음은 주님의 세례가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례와 복음 선포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 비중을 두고 언급하는 것일까요?
 
 오늘 루카 복음에 따르면 주님이 백성들 사이에 서서 세례를 받으셨고 기도를 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루카 3,21-22). 루카 복음은 주님 세례를 통해, 기도와 성령의 오심이 연결돼 있으며 이것이 모든 복음 선포의 근원적 뿌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창조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상징합니다. 일찍이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짊어진 세상의 고통 때문에 어머니 모태에서 나오지 않았기를 절규했습니다(예레 20,17-18).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의 모태가 무덤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위해 물에 잠긴다는 의미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례는 생명의 여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세례를 위해 잠기는 물의 의미는 어머니 모태에서 생명체를 감싸고 있던 그 생명의 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기다리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심연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는 그 죽음의 심연을 거쳐 이제 새로운 생명에로 건너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새로운 생명에 뿌리가 되는 것이 기도이며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세례의 놀라운 은총이 지속되려면 절대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됐다는 새로운 관계를 실현시켜 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 하느님 앞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며 자신의 얼굴에 스며있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적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숨을 쉬게 합니다. 그 기도의 결과로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닫혀졌던 영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신과 저항 이후로 닫혔던 하늘이 주님을 통해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세례에서 시작한 주님의 복음 선포의 장은 세상과 하늘을 연결시켜 주는 하느님의 문인 것입니다. 열려진 그 문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비둘기 형체의 성령이 옵니다. 비둘기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일관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며 생명의 숨결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주님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깨달아야 하고, 마찬가지로 세례 받은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이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한계와 죄와 죽음으로 얽혀있는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주님의 세례는 당신을 낮추어 비우시고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창조적인 생명으로 드높여지는 삼위일체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증언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면서 완전한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체험한다면, 나를 통해 그 기쁜 소식이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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