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루카 4,21-30)

2013. 2. 2. 오전 6:18:40

글자


2013년 23일 연중 제4주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1-30)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백성에 맞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이제 민족들을 위해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제1독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값지게 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비결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은사도 무의미하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셨으며 당신을 통해 주님의 은혜로운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 은총이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그 말씀이란 지난 주일인 연중 제3주일에 우리가 들었던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런데 오늘 복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잡혀간 이들이 해방되거나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퇴짜를 맞고 그분을 죽이려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는 가운데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에서여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이라서, 이스라엘 민족이라서 은총을 더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이방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렙타의 과부도, 시리아의 나아만도 예언자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은총의 그릇을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했지만, 이 은총의 메시지를 가져오신 예수님은 배척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좋은 얘기는 하였지만 구세주라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 네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고 가족관계나 환경을 보면 우리와 별로 특별한 것이 없고 너를 빤히 아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가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하느님을 받아 모시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해서 잘 안게 아니라 잘 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이 눈을 가려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확실히 알면 힘이요, 능력인 것을! 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사물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지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예수님께 얽힌 기억이 남아있어서 다른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구세주는 이러저러한 분으로 오셔야 된다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를 앞에 놓고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압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코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좋은 점 보다도 허물을 잘 봅니다. 좋은 점은 작게 보고 허물은 아주 크게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루카6,41).고 하셨습니다. 혹 내가 이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오히려 그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 여러분, 무엇이 보입니까? 볼펜, , 좀더 자세히 보면 검은 볼펜을 들고 있는 손, 검은색 모나미 볼펜을 들고 있는 신부의 손
잉크가 반 남아있는 검은 색 볼펜.이렇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극히 일부를 보고서 전체를 다 아는 양 말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만큼만 보고 다 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잘 안다는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은총을 내박쳤습니다. 긍정적인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고도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선입관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웃, 남편과 아내, 자녀 안에 긍정적인 장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그것을 못 보고 허물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상대를 거부해야 합니까? 긍정적인 생각을 품으면 은총의 길이 열리는데 왜 부정적인 생각에 더 매달려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하였으면 거기에 더 큰 마음을 두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소리를 왜 합니까? 잘못된 선입관, 시기와 질투, 너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야! 내가 너보다 더 낫지.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2독서를 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 나를 뽑으셨다는 것은 잊은 채 허물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선입견에 묶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는 은총이 컸지만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치는 은총을 부어주려 하셨지만 주지 못하고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넘치는 은총으로 다가 오십니다. 무엇이 그 은총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걸림돌을 제거하는 한 주간 되시기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생각과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가운데 은총의 그릇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상대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욕심이 생기면 부정적인 모습이 더 많이 보입니다. 혹 다른 사람의 부정적이 모습이 보이거들랑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할 소명과 함께 내가 많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2독서는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코린 13,4-7)고 하였습니다. 사랑대신 를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랑이 충만이 있는 사람인가요? 사랑을 살기를 희망하며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

-신대원신부-

 

연중 제4주일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 당신의 사명선언문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할 사명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를 선포하시는 일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이 넘쳐나도록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억울하게 잡혀가 영어(囹圄)의 삶을 사는 그들이 목 놓아 자유를 노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똑똑하게 목도(目睹)하도록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서 그 모든 일이 곧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에서 비롯됨을 온몸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 사명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성적 신앙인들이다. 예수께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낭독하실 때에도, 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들은 열성신자답게 그 말씀을 하느님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돌연 무서운 집단적 패거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잘못되고 왜곡된 신앙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한 예수님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고는 헐뜯기 시작했다. 급기야 모두 화를 내면서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루카 3,29-30)했다. 열성적 신앙인들이 삽시간에 흉악무도한 패거리로 돌변하는 순간이며, 그들이 자긍심을 지녔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순간이다.

 왜곡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기적(잿밥)'에 더 관심을 끌게 하고, 오로지 기적만을 강조하게 한다. 주님의 참된 말씀을 앞세워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그릇된 욕심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일시적 영달을 채우려는 못된 마음 씀씀이가 문제다.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자 행하시는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갈라지고 다투며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류를 바로잡으시려는 은총이요 은사다. 따라서 은총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당신 자비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방문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임을 깨닫기보다는 고향이라는 것을 내세워 몇 배나 더 강한 기적을 행할 것을 주문하려 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느님이 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당신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분이 뽑아 세운 일꾼들은 또다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분을 '감실(龕室)'에 가두고, 감실 안에 계시는 분만 세상에 소개하려 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라 그들만의 주님으로 섬기려 하기에 그분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뜻을 저버리는 신세로 전락하려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를 일깨워주기는커녕 그분을 다시금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 그 옛날 나자렛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는 교회의 몸이시며 머리이신 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고"(2티모 1,10), 또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선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입으로는 무엇인들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그분, 교회의 몸이시고 머리이신 분의 말씀을 듣고 화를 잔뜩 낸 적은 없는가.

 잘못되어 돌아가는 정치에 일침을 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작고 약한 이들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쥐꼬리만한 세속 권력에 기대려 하고, 교회의 안보를 내세워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험담하고, 입만 열면 '십자가' 운운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교묘하고 해괴한 논리로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진리나 진실보다는 권력과 재물과 학력에 모든 것을 걸려는 삶의 행태야말로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나 일꾼이라고 감히 불릴 수 있을까.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주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참된 믿음을 잃어버렸거나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혹은 훼손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재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이기양 신부-


교구 사제 인사에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출신지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당 사정도 잘 알고 많은 신자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출신지 성당이 사목을 하기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잘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사목자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갈등이 빚어질 때 인간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바로 그 점이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사목자로서의 전문적 안목과 고민을 거듭한 숙고에 의해 결정된 사항도 인간적 경험과 친분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출신지 본당으로는 사제를 보내지 않는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겪었던 일 같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그 권위에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금의환향하듯이 오랜만에 고향 나자렛을 찾으셨습니다.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권위있는 말씀에 탄복을 하면서도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나자렛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속된 사람들의 눈엔 구원자 예수님에게서도 그저 인간 예수만이 보일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 행동을 보시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시대나 사제의 출신지 본당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성당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는 인간적 능력에 따라 그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계셨기에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는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뽑아 세우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또 출중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또 그 부르심에 모든 것을 다 놓고 응답했을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 능력이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인 것이지요.

흔히 우리 시대를 권위 부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랜 독재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권위 자체에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권위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권위가 없으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집안이 무너집니다.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교육이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의 권위를 환자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병 치료는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국민들이 우습게 안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권위는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돼야 하는 것입니다. 지켜지고 존중돼야 할 권위를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권위자 자신임은 물론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권위가 없는 성당은 신자들이 불행합니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는 복음적 삶에서 비롯돼야 하지요. 참으로 좋은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믿으며 그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를 깊은 뜻으로 마음에 담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이뤄집니다. 그 때 신자들은 행복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 또한 그런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에 성화해 더욱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복음적 공동체라고 이야기하고 바로 이런 공동체에서 기적은 이뤄집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나자렛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넘쳤을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사셨던 축복된 나자렛이었지만 속된 경험과 편견으로 길이 지속될 은총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믿음과 혜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도전받는 예언자

 

 -강길웅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용기있게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부패되어 있으면 부패된 것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고통이 여기에 있었으며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소명받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BC 600년대에 활약했던 이스라엘의 대 예언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나라는 멸망되어 가고 있었고 사회는 썩어 부정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가 걸어야 할 길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백성을 회개시키고자 하는 예레미야의 노력이 오히려 비난과 오해를 받아서 감옥에도 갇혔으며 도망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까지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는 핑계도 변명 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박해와 고난 속에서 평생 을 외롭게 걸어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으며 아모스나 호세아도 그랬고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자들만이 그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된 다는 것은 고달픈 길이면서도 또한 은혜로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와 꿈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저도 고향과 동족들로부터 배척받았다는 사실이 예언자 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빵을 좋아하며 기적을 좋아하고 명예와 권력을 좋아합니다. 자기들 동네에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나왔다 하면 환영을 합니다. 하다못해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해도 동네의 자부심이 세워집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에서 다 배척하셨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빵을 약속하지 않으며 명예와 권력 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이면 그것이 사람들 가슴에 쓰든지 시든지, 용기있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반대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일 복음 내용의 연장입니다. 사람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되었으며 하느님의 성령이 그분 위에 내리신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자기들 고향에서 그만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 큰 자랑과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인간의 조건을 봤을 땐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사람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곧 잘 하시던 기적도 자기 고향에서만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혜택 이 자기들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으며 예수를 잘 안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의 빈정거림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을 저버리고 벌을 받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큰 모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들고일어나 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분을 벼랑으로 끌고가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이 그 모양입니다. 올바른 소리를 싫어합니다. 사회가 썩어 있으면 더 그렇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 시대를 경험하면서 시대의 예언자들의 용기가 얼마나 훌륭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독재자의 말로가 또한 어떠했는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언의 직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사명 중에 첫째 가는 것이 예언직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외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정에 물들지 않는 깨끗하고 양심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서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로 배척의 연속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칼부림으로부터 십자가의 창끝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백성과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당신을 죽인 그 세상과 백성을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희생, 용기를 배워서 예언의 직무에 참여해야 합니다.


연중 제4주일  
루가 2,22-40 (다)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1. 복음이야기(루가 4,21-30)
예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루가 4,16-21).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척들과 고향사람들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은총의 말씀에 고향사람들 모두가 놀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고작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쳐라”라는 속담을 들이대면서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기적들을 나자렛에서도 행하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라는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적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마르 6,6).
 

기원전 9세기에 예언자 엘리야는 많은 이스라엘 과부들을 제쳐두고 오직 이방인 과부를 돌보았습니다(1열왕 18,7-16). 그 제자 엘리사 역시 많은 이스라엘 나병환자들을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셨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배척한데 비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향과(24절) 동족을(25-27절) 경시하는 말씀을 하시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는 복음서 작가 루가의 구원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작가는 자신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본디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원시교회의 신도들은 모두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먼저 유다인들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와 사도 바울로의 개심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잘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족과 고향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으셨으나 이방인들과 타향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교회의 미래를 올바로 바라보는 예언자적인 슬기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예언의 정신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함께 수용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치우쳐 믿음 없이 교회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흥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지성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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