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가 15,1-3.11ㄴ-32)
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1669, 캠버스에 유채화, 262 X 206 cm,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아버지의 시선
말씀의 초대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먹었던 주식이다. 땅에서 나는 소출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음식이었다. 만나를 먹는 동안 그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직접 체험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야 했다. 스스로 일해서 땅의 소출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제1독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옛 계약은 지나갔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그분과 화해하는 길이요, 은총을 얻는 방법이다(제2독서). 누구에게나 작은아들의 모습은 있다. 자신의 힘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실패를 체험하면서 바뀌게 된다. 실패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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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두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한 아버지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물려받자 곧바로 객지로 떠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가출입니다. 돈을 손에 쥔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운 돈을 물처럼 다 써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몽땅 날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정신 차리고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돈이 떨어진 작은아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돈 힘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비참함을 체험할 때 은총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처참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을 맞아 줄 아버지의 ‘여러 모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꾸중하는 모습입니다.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 많은 재산을 다 어떻게 했느냐?” 분노하는 모습 앞에서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다음은, 침묵하는 모습입니다. “잘 왔다.”는 말씀도, “왜 왔느냐?”는 물음도 없는 차디찬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은 꾸중하는 아버지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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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부견자’(虎父犬子)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 아버지에 개아들이란 뜻으로, 아버지만한 아들이 못 되고 속을 썩이는 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견부호자’(犬父虎子)일 것입니다. 비록 부모는 천하지만 자식만큼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모의 마음같이 움직여 주지를 않습니다. 자식 농사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잦은 잔소리와 강요, 심지어는 윽박지르고 호통을 친다 해도 자식만큼은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부모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자녀 교육이 이 세상 많은 부모들의 고민거리입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바로 부모의 이러한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그리고 당신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운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가 잘되도록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며 때로는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면, 타락한 아들이 돌아온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가눌 길 없어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여 이웃에게 이 체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고통
-박동호신부-
‘탕자의 비유’쯤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사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칩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이로 여기고 제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긴 둘째 아들의 행위는 분명 패륜입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수모는 정의의 실현이라 함이 옳습니다. 뉘우쳤지만 아버지께 돌아가는 그가 참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신창이로 돌아오고 있는 그를 아버지는 멀리까지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복음은 간단히 ‘가엾은 마음’이라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이 ‘가엾은 마음’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신 마음이라 설명합니다. 수도 없이 당신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이지만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버리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셨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 아들을 죄로 만드셨을까요? 하느님께서 품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차라리 극단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허구의 것 혹은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상들이 허다합니다. 복음의 둘째 아들처럼 그렇게 패륜의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는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려받을 유산이라고는 ‘빈곤’밖에 없는 젊은이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도 가엽게 여겨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줄 몇몇 높은 분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이대로 영원히’를 노래하지만, 대다수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돼지 치는 일”자리마저 구걸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발전과 성장, 그리고 ‘고진감래’를 들먹이며 고통을 강요하는 이들은 태연하기까지 합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굶주리고 있으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개인과 정부에 촉구한다. ‘굶주림으로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고 한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사목헌장,69항)합시다.
패륜한 아들의 목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로 만들면서까지 움켜쥔 하느님의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값싼 허구의 이야기 소재쯤으로 여긴다면, 하느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염치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회개와 참회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잔치에 참여해! 말어?
반영억라파엘신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중성’을 지닐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지내다가도, 이해득실이 주어지면 속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집 나간 아들과 아버지 곁에 있던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집 나간 아들을 ‘못된 놈’으로 볼 수 있고,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을 ‘효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속이 드러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겨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길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산으로 받은 재산 모두를 잃기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 곁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효자의 속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습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집을 나간 놈인데 신경 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자기가 선택한 운명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아버지 품은 한없이 넓고 깊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를 거부하였습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15,29-30).하며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설득합니다.“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였을까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큰아들 입장이라면 그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을 이럴 때 해야 하나 봅니다.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크고, 넓고, 깊으신 우리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그분의 자비가 그리웠을까요? 불만이 많은 큰아들을 보고 “동생 하나 못 받아 주느냐? 속이 좁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의 속은 얼마나 넓은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챙기는 속을 보아야겠습니다.
작은아들이 밑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졌을 때 그 안에서 사랑의 아버지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반드시 실패 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살았다고 해서 꼭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작은아들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처럼 늘 아버지 곁에 있으니 나는 효자라고 생각하며 교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인정할 때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현주소를 알고 아버지의 품으로 간다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더없이 큰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늘 행복의 원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