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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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가 13,1~9)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신다. 그는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도망쳐 와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이 평범한 목동으로 일생을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기적을 보여 주신다. 모세를 압도하시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모세는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고 경건한 모습이 된다(제1독서). 이스라엘은 모세와 하나가 되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 생활의 고생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게을러졌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에 소홀해졌다. 당연히 그들에게 보속이 내렸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회개를 말씀하신다. 회개는 새로운 시작이다. 지난날의 잘못에 매여 있지 않고 과감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도 거름을 주면 다시 열매를 맺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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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회개는 새 출발의 다짐입니다. 삶의 무거움을 벗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진정 은혜로운 일입니다. 이를 공적으로 ‘함께 시도하자’는 것이 사순 시기의 정신입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금방 시들해하고,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도 어느 날은 사정없이 까발려 버립니다.
변덕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슬픈 본능’입니다. 끊임없이 ‘새 출발’을 다짐하지 않으면 회개 역시 변덕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뉘우치는 모습을 먼저 연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닙니다. 회개는 뉘우침을 넘어 ‘새 출발’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 회개는 작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큰 회개가 요구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작지만’ 잘못된 습관에서 돌아설 때 우리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자연스레’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하여 칭찬보다 비난이 많다면 고쳐야 합니다. 물질을 대하는 자세에 욕심이 넘친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본능을 조절하는 길은 ‘극기’밖에 없습니다. 남은 사순 시기 동안 ‘희생’과 ‘절제’를 연습한다면 우리 역시 ‘부활하는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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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엄청난 자연재해를 겪을 때마다 분명 그 안에 하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하늘의 노여움을 사도록 행동한 것은 없는지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신흥 명나라를 치자는 주장이 유학자들 사이에 대두되었을 때, 이는 무모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이 명나라와 내통했다 하여 이들을 포함한 수십 명을 청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중에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 청주성 안에 큰물이 들이치기 시작하여 백성들이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공민왕은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벌을 받고 있음을 하늘이 알고 홍수로 응징한 것으로 여기고 이들을 방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사들이 그들을 학살한 사실과 그 옛날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깔려 죽은 일을 예로 드시면서, 이 모든 참변들은 단순히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재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듯이, 예수님께서도 비극적인 사건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회개를 요청하는 하늘의 표징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시대의 징표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떠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지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해 봅시다.
심보를 바꾸는 것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 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 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돼야"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은 빌라도의 박해로 살해당한 사람들 이야기와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악의로 인해 발생한 살해 사건이지만, 다른 하나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한 사고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 주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인이건 아니건 모든 이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건이 신앙인들의 믿음을 동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곧 신앙인들은 이런 일들을 주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과연 주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신 것인가 아니면 방관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의인들 죽음과 무죄한 이들 고통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또는 악의 뿌리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계속 되는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신앙에 의혹과 시련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유혹과 시련이 교차하는 세상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깥에서만 구경하듯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얽혀 깊숙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런 사건들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꿔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은 우리에게 죄를 인식시켜 우리를 의혹과 저항과 시련 속에서 지배합니다. 그래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주눅 들어 하는 종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주님은 우리를 희망과 자유의 종으로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어 우리를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당신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20).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는 말(루카 13,6)은 바로 주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향해 새로운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주님의 백성은 이제 새로운 열매를 맺는 회개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회개의 삶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삶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회개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삶과 함께 얽혀계신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의 누룩(루카 12,1)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누룩(루카 13,21)이 되도록 변화돼야 합니다. 위선의 누룩은 교만과 탐욕의 힘으로 삶을 지배하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누룩은 겸손과 빈 마음으로 오히려 남을 섬기게 합니다. 위선의 누룩은 인간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마음 속에 가둬 결국 죽음으로 밀어 떨어뜨리지만, 하느님 나라의 누룩은 인간 마음을 사랑으로 열게 하여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누룩을 이렇게 비유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6-8).
하느님 나라의 누룩과 같은 삶은 모든 이에게는 생명의 빵이 되지만, 자신은 잃고 사라지는 음식의 소금 같은 삶일 것입니다. 이것이 축제를 기다리며 보내는 사순시기의 영적 양식과 영적 음료가 되도록 묵상해 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한 노부부가 반세기 가까이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서로의 삶은 늘 고달팠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건만 두 분의 삶은 ‘화기애애’, ‘알콩달콩’이 아니라 언제나 ‘티격태격’, ‘용호상박’이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코드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였습니다. 결국 살아온 배경, 가정환경의 차이였습니다.
아침식사 때 마다 남편은 아내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늘 툴툴거렸습니다. 식탁에 앉자마자 부인은 갓 배달되어온 우유를 남편에게 따라주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옛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컵의 80% 정도만 따라주면 마시기도 좋고 쏟을 염려도 없을 텐데, 부인은 매일 같이 큰 머그컵에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찰랑찰랑 따라주는데, 요즘 같아서는 손 떨림 증세도 있고, 그걸 쏟지 않고 마시기 위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러려니 했었지만, 결혼생활 40년이 지난 어느 날 도저히 참지 못한 남편은 한 바탕 퍼부었습니다.
“왜, 아무 것도 아닌 걸로 평생 동안 날 괴롭히냐구! 우유 따라줄 때 먹기 좋게 80% 정도만 따라주지 왜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따라줘서 날 힘들게 하냐구?”
남편의 말에 부인은 큰 충격을 받고 앓아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 부인의 가족들은 뭐든 아끼고 아꼈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신선한 우유 가득 부어 원없이 한번 마셔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큰 머그컵에 가득 가득 우유를 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아침마다 사랑을 따라준 결과가 “왜 평생 날 괴롭히냐?”였으니 할머니가 앓아 누을 수 밖에요.
또 다른 노부부는 성격차이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이혼하기로 하였답니다. 두 분을 담당한 변호사가 안타까운 나머지 사연이라도 들어보려고 노부부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날 식사의 주 메뉴는 통닭이었습니다.
매너가 온 몸에 잘 배어있는 할아버지는 그날도 습관처럼 통닭을 쭉 찢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앞가슴 살을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는 앞가슴 살을 손으로 확 뿌리쳤답니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40년 동안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셨답니다.
“40년 결혼생활 동안 당신은 늘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었어. 난 통닭 앞 가슴살 팍팍해서 정말 싫단 말야. 난 뒷다리가 제일 좋단 말야. 당신은 같이 살아오면서 내가 어느 부위를 좋아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그 순간 할아버지는 충격에 빠지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가슴 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꾹 참고 40년 동안 당신에게 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순 제3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의 삶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 과연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회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서 나와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일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보다 충만한 인생 여정을 위해 선물로 보내주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더 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직장동료, 이웃들이 지니고 있는 남모르는 고통과 상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작으나마 위로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서로 잘 안다고 해도, 정말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 계속 대화하면서 꼬이고 꼬인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