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4일 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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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약속하신다.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넓은 땅을 주겠다고 하신다. 약속의 땅이다. 아브람은 감사의 제사를 바친다(제1독서). 신앙인은 장차 올 하늘 나라의 시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반드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굳건히 살아가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가신다. 당신의 천상 모습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란다. 베드로는 이곳에 좀 더 머물자고 한다. 하늘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보더라도 오늘의 사건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배려이시다(복음).
오늘의 묵상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충격 요법입니다. 놀란 베드로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산을 내려오던 다른 제자들 역시 말이 없습니다. 잠시 혼이 나갔던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감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방황과 옛 직업으로 돌아갈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대로 두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핵심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배려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체험은 있습니다. 인생에서 낙담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하신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는지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은 분명 있습니다. 우연히 마무리된 것이 아닙니다. 은총의 개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시기에, 필요하다 여기시면 언제든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사순 시기에도 우리가 겪는 사건마다 은총의 개입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그분의 뜻을 먼저 헤아려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오르시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때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해 주십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는 제자들을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얼마 뒤에 제자들은 스승을 잃고서 스승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자신들도 걸어야 할 운명에 놓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나약한 제자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길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중도에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때 당신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이 기억할 수 있게 배려하심으로써,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들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실로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신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초막을 지어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유혹도 은총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유혹을 많이 받으셨죠? 사순절을 맞아 희생 봉사, 극기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없던 일이 생기는지…그래도 나름대로 절제된 삶을 통해서 기쁨을 간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 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피정을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바뀐 것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바뀌었습니다. 나의 얼굴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흰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예수님으로 온 몸을 무장한다는 의미(로마13,14)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옥좌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는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묵시7,13-17).
결국 흰옷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이니 만큼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 줌으로써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위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명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오직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하며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루카9,35).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손에 펴들고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 삼아 주님의 초막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미국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다양한 직업을 갖기도 하였으나, 문명을 등지고 고향 콩코드와 월든 숲에서 산책과 명상, 노동으로 영적인 삶을 보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당시 ‘해리슨 블레이크’라는 신학자와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영적인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 편지 글에서 ‘소로우’는 이야기 합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수동적인 방법으로 따뜻함을 구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얻어진 따뜻함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내면의 적극적인 따뜻함은 맹렬한 아궁이를 견딜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분명 이 세상의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한 끼의 음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혼과 믿음, 구원을 운운하는 것은 분명 배부른 자의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그 같은 인간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욱 철저히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시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들 때문에 오늘 그 아픔을 이길 수 있는 당신 희망의 변모를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인생길에서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 알고 계셨던 분이셨기에 영광스러운 변모 전에 이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분명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때론 비난을 받기도 하며, 바보가 되어야 하고, 손해를 보며 미쳤다는 소리도 듣게 되어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은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분명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런 변모 전에 예고 말씀을 하신 뒤 변모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루카 9, 27)
진정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고통을 우리를 위해 겪으시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고통으로 끝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시고, 참된 희망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 오늘 또다시 그 영광의 변모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변모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결코 당신 혼자만의 변모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같이 변모해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지상 생애의 절대적인 가르침이셨습니다.
반드시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용서와 사랑을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셨기에 우리도 그 영광의 변모를 체험할 수 있음을, 그것도 이미 이 지상에서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정이나 특별한 신앙 교육을 통하여 얼굴빛이 환해지는 모습이나 느낌을 경험하였습니다. 교육의 장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져 있음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또한 영광스럽게 변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생의 순간순간 마다 변모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며 넋 나간 사람마냥 그곳에 그냥 눌러 앉아 있겠다는 고백이 아닌, 예수님처럼 변모하겠다는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예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뼈를 깎는 애씀과 노력 끝에 나 또한 거룩히 변모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의 변모에 함께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영성가 이신 ‘헨리 나웬’ 신부님은 변모되어야 할 모습에 대해 이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이 세상의 영광된 변모입니다................◆
[말씀자료 : 배광하 신부(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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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환신부-
변모, 희망이라는 선물
어릴 적에 감명 깊게 읽은 동화책이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입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과정인데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 입니다. 그 이유는 한 애벌레의 변모로 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존재의 변모가 다른 모든 존재에게 희망이 된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자기의 겉모습이 죽어 없어질 때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세 15,5-6) “나는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준다.”(창세 15,18) 그런데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해선 자기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나그네살이를 해야 한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에는 많은 후손도 없었고, 많은 땅도 없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어도 끝까지 믿은 신앙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거룩한 변모를 했습니다. 그분은 영광에 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고, 구름 곳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그런데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바쳤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본 영광된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게 더 놀랍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변모하려고 할 때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고 고향 땅을 버려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싫어하고 베드로처럼 안주해 버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이 말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그냥 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젖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광에 싸여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겁이 났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수난을 겪은 뒤에야 그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변모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 끝이 멸망이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면 그 끝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피 3,20-4,1)
우리는 왜 신자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부끄럽게도 특별히 다른 게 없습니다. 우리에겐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와!”하고 입을 벌릴 사람도 없고, 우리에게 향기가 있어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으며, 우리 모습 때문에 인생을 바꿀 사람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변모해 봅시다. 비록 수없이 깨지고 넘어지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을 위하여 아픔을 봉헌합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