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루카 4,1-13)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013. 2. 17. 오전 7:43:02

글자
 
 
2013년 2월 17일 사순 제1주일

<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루카 4,1-13)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원래 떠돌아다니는 부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집트에 내려가 큰 민족이 되었고, 주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다. 그분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로 남았을 것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어디서나 은총이 함께할 것이다.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제2독서). 악마는 광야의 예수님을 유혹한다.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신 그분께 돌을 가져와 빵을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신다. 악마는 늘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기에 모든 유혹에는 힘이 부친다. 은총만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단식을 마치고 허기지신 예수님께 빵을 만들어 보라며 충동질한 것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그분께 ‘빵 하나’ 만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거절하십니다. 자신을 위한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긴 여운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악마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갑니다. 그러고는 ‘뛰어내려 보라’며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떨어지는 그대’를 천사가 잡아 주지 않겠느냐며 충동질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뛰어내리셨다면 얼마나 철없는 위인이 되셨을까요? 유혹은 이렇듯 유치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감정에 속아 유혹에 발을 내밉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까지도 유혹한 악마라면 당연히 우리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혹에는 예외 인물이 없습니다. ‘나만 왜 유혹에 시달리는가?’ ‘나는 왜 여태껏 이 유혹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느낌이 들면 오늘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마를 물리치셨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입니다. 사순 첫 주일에 우리는 유혹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처신이 바보같이 보였지만 결국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저러한 소리가 나면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확인해서 콧대를 꺾어주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유혹의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유혹도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유혹을 통해 내 자신을 볼 수 있고 더 큰 성숙의 기회로 만드는 은총의 날들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 허물어져 폐허가 된 성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그곳은 한때 그 권세와 덕망이 사방천리를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청소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이 이렇게 된 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이란다. 젊은이가 놀라서 네? 그건 잘한 일인데 어째서?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좋아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네! 그렇습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 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을 보면 악마는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4,13)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이겨낼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힘과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유혹을 통해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증명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유혹을 통해서 이뤄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부와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 못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더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 비춰야 합니다. 유혹과 시련에서 지면 보통인물이 되고 유혹을 이기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넘어가면 달콤한 죽음이요, 넘기면 쓴 보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하고 말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기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27,42)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 강도까지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23,39)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결국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큰 산 같은 예수님

양승국신부

형제들과 ‘1박2일’ 비슷한 것을 하러 바닷가로 갔습니다. 큰 방파제가 하나 있길래, 답사해보려고 차를 몰고 방파제 쪽으로 향하는데, 진입로 양쪽에는 ‘유혹거리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수족관 마다 가득 차 있던 ‘자연산 횟감’들, 식당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흐뭇한 냄새, 떠들썩한 분위기는 강하게 우리들을 손짓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마음 약해지면 절대 안 되,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뭐야? ‘극한 체험’을 하러 왔는데, 초반부터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되지.

그런 마음과는 달리 몸은 따로 놀았습니다. 마침 한 청년이 우리 차 앞을 가로막더니 맛있게, 푸짐하게, 그리고 싸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앞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뱃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꼬르륵 소리... 저는 단 몇 분 만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다양한 유혹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죽어도 끄떡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지만 작은 바람 한 줄기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때 금강석 같던 다짐도 오래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큰 산’처럼 여겨집니다.


악마의 유혹은 참으로 달콤했습니다. 악마가 눈앞에 펼쳐놓은 장밋빛 청사진,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유혹들 사이로 난 생명의 길로 홀연히 걸어가십니다. 그 달콤한 제안들 앞에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길을 유유히 걸어가십니다. 참으로 당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聖人)이란 한 가지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성인들이 지닌 공통점 한 가지는 자신의 내면 안에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에너지들을 통합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정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방향’이란 결국 영성적인 삶이겠지요. 가난한 이웃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겠지요.


예수님의 일생 역시 비슷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자렛에서의 30년간 숨은 생활 동안 예수님은 많은 수련을 닦으셨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들을 한 방향으로 통합하는 수련,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의 삶이란 유일한 목표를 위해 많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극도로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의 선택을 위해 부차적인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작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짧은 생애, 오직 한 가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만 충실했던 예수님, 보다 큰 목표를 위해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내면이, 예수님의 삶 전체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새로운 광야의 길
-
강길웅 신부-

은혜로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 은혜로운 것은 우리가 이 시기 에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부활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 은 첫 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생활을 했으며 그리고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에는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게 되니 그 감회가 窄떨?깊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세월 어려웠던 사건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죄의 결과였으며 그때마다 하느님은 벌을 주셨지만 그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기 위한 그분의 섭리 요 계획이셨습니다. 지내고 보니 하느님의 사랑이 아주 새롭게, 그 리고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은 누구나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몸 붙일 곳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고달프게 걸어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두루 체 험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느끼기도 하며 버림과 치욕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느님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드뭅니다.

언젠가 병상에 누워 있는 어떤 형제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아프고 보니 예수님이고 하느님이고 안 보인 다는 것이며 기도하며 선하게 살았던 결과가 고작 그것이냐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사실 고통을 말할 자 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없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바로 그 비슷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며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곳이며 또한 마귀의 유혹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예수님 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순절이라는 광야에서 똑같은 것을 체험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 즉 빵 과 권력과 공명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욕망에 대해 묵상을 해야 하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는 오히려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나누기 위해 우리의 '광야'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순절은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을 새로운 각도에 서 다시 한번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돈이고 권력이고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 치 바닷물과 같아서 배가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인데도 "물! 물!"하면 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나누면 나눌수록 넉넉하게 됩니다. 호 주머니에서 아무리 꺼내어 나누어 줘도 늘 가득 차 있는 넉넉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은혜입니다.

성당마다 아름다운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서 자신들을 희생하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자들을 보 면 그 안에 꼭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의 영광을 자기들이 얻으려는 공명심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리면 얻는 명예와 은혜가 더 큰데도 그걸 모르고 이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기가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요즘 가정에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자녀가 여럿일 때는 형제들이 서로 이해와 양보와 희생이 저절로 뒤따랐습니다. 그래야만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하나나 둘이기 때문에 그들이 양보와 희생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집,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형제들간에 위 아래로 부딪치면서 고통을 배워야 하는데 그 수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화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광야를 체험하고 고난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를 봉헌할 때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서 내 자신을 이웃에게 내주고 베풀어 줄 때 참다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사순절은 교회 가 의미있게 걸어가는 광야의 길입니다. 고통을 체험하며 그것을 은혜로 성화시키는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또다시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용기있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김웅열신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악마와 싸우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자주 듣지 못하는 강론이지만 악마에 대해서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합니다.


현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 중에 하나가 뭐냐? 악마라든지...아니면 지옥이라고 하는 단어를 가장 거부한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 역시 악마의 짓입니다.


요즘 신학교에서는 악마에 대해서 배우지 않습니다. <악마론>이라고 하는 과목자체가 없어져버렸고, 수도원에서도 악령의 존재에 대하여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만큼 교회가 악마의 교묘한 술책에 넘어가고 있다고 하는 뜻일 겁니다.


사제와 수도자들 가운데서도 악마 이야기를 하면 “세상에 무슨 악마가 있어요? 그것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지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쉽게 말합니다.

또 많은 교우들도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성서에 예수님께서 악마와 40일 동안 싸웠고, 악마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유시키신 얘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현대는 자꾸만 이 사탄의 존재를 철학적으로만 해석을 하려합니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유명한 피정강사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신부님은 연세가 90이 되셨지만 한평생을 무슨 주제만 가지고 피정지도를 했느냐? 오로지 지옥이라든지, 악마에 대한 것을 가지고 한평생을 강의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요한바오로2세 교황님께서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고위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그 신부님을 불러서 피정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추기경, 대주교, 그리고 교황님이 앞에 계신 그 자리에서 삼일동안 강론을 하면서 뭐라고 말씀을 드렸느냐?

“제가 90이 될 때까지 사제생활을 하면서 많은 주교님들의 추기경님들의 강론을 들어봤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주교님들의 입으로 지옥얘기라든지, 마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직무유기요! “

이렇게 강하게 고위 성직자들에게 피정지도를 했다고 합니다.

대주교님들은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사일에 끝날 피정을 삼일을 연장시키고, 삼일동안을 뭐만 했느냐? 그 신부님에게 추기경님들이 성사를 봤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악마는 교묘하게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숨기고 있습니다.

악마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교리입니다.

저는 사제생활 25년 가까이 하면서 수도 없이 악마와 싸워오고 있는 사제입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신자에게서 악마를 떼어주고 있습니다.

악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존입니다.

한 집안, 한 영혼, 한 본당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 악마가 예수를 유혹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악마는 바로 루치펠을 얘기합니다. 루치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뜻이 ‘샛별’, ‘빛을 지니고 있는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루치펠은 천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사였으며 많은 천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장이라는 대단한 능력을 루치펠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펠은 교만에 가득차서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다가 미카엘 대천사에게 쫓겨서 그 졸개들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천국에 있을 때는 ‘루치펠’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국을 벗어나서는 이름이 바뀝니다.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탄’ 이라고 하는 말뜻은 ‘거역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천사들을 용서 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던져서 심판 때까지 어둠속에 갇혀있게 하셨다>

천국에서는 ‘루치펠’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던 천사장이 타락하여 그 이름이 ‘악마’ 또는 ‘사탄’ 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부하 졸개들에게는 ‘마귀’ 라든지 ‘악령’ 또는 ‘악신’ 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우리 신자들은 ‘사탄’ 이나 ‘악령’ 이나 ‘마귀’ 나  다 두루뭉실하게 얘기하지만 다릅니다. 제일 쎈놈!  바로 ‘루치펠’ 한테 붙여진 이름이 ‘사탄’ 이고 ‘악마’ 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악령’ 이 예수님을 끌고 나간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루치펠이였던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악마와 악신들은 다시 말하면 루치펠과 그 졸개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자기들의 탓으로 악하게 되었다.> 라고 악마와 악신들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이 악마와 악신들이 사람을 죄로 유인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마습입니다사람을 공격하여 괴롭히고 귀찮게 하거나 심한 공포와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헛된 얘기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귀신 얘기라든지, 도깨비 얘기라든지, 이런 것들 이런 것 때문에 늘 불안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공격하는 방법은 부마입니다. 직접 그 사람에게 신접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접신을 해서 비정상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때로는 초능력이 나오게 만듭니다. 무당에게 접신을 해서 작두날 위를 걸어도 베지를 않게 하고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짜리가 80키로가 넘는 사람의 몸을 들어 던집니다.

바로 제가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마귀가 걸려서 왔는데 대단히 강한 마귀였습니다.

4학년 여자아이 입에서 굵은 할아버지 목소리가 나왔고 구마를 시작하자마자 저는 멱살을 잡혔고 초등학교 4학년 되는 그 여자아이가 85키로 되는 이 몸무게를 달랑 들어가지고 제대 앞으로 내던졌습니다.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믿지 못할 겁니다.

이만큼 부마자들은, 다시 말 하면  마귀에 접해있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마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에페소서 4장 22절에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속아서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려야 됩니다.> 죽을 때까지 마귀들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남아메리카 밀림 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독이 강한 ‘부쉬마스타’라고 하는 독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사의 빛깔이 너무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 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지개의 영롱함처럼 황홀하여 넋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넋을 잃고 독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독사는 사람에게 달려들어서 단 한순간에 생명을 뺏어간다고 합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그 덫은 황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 앞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그냥 사탄한테 물려버립니다.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팔만대장경에 보면 이 사탄의 유혹을 ‘구별 없이 달라붙는 버러지’ 라고 표현했습니다.

유명한 작가인 헤르만 헷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유혹이 늘 닥쳐오는데 육체의 향락적인 욕심이 첫 번째요.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이 두 번째 유혹이요.

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그 세 번째다.’ 라고 얘기합니다.


성서 상에 오늘 예수님이 당한 유혹은 그 세 가지가 중심이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의 욕심을 갖게 합니다. 사탄은 늘 물질을 가지고 ‘이 돌더러 빵이 되어 봐라!’ 하면서 오늘 예수님 유혹했듯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을 갖게 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느님을 시험해 보고 싶어 하는 유혹갖습니다.  ‘나한테 절만 하면 세상 것 다 주겠다.’

세 번째로는 권력에 대한 유혹끊임없이 합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도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높이 올라가야만 직성이 편하고 높은 자리에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 백의종군할 줄을 모릅니다. 건방을 떱니다.

이 권력에 대한 끝없는 유혹은 어느 단체이든지 있지만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어느 직책이든지 죽으라고 주신 직책이요! 신자들에게 밟히라고 주신 직책이지 유세떠는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 봉사의 직책이지 힘을 쓰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성서에 ‘사탄’ 다시 말하면 ‘악마’ 는  예수님을 세 가지로 유혹해보고 통하질 않자 완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루가복음 4장 13절에 맨 마지막에 나오듯이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

마귀라고 하는 놈은 이 사탄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 지고 난 다음에도 완전포기를 하지 않고 다음기회를 노리고 떠나갑니다.

다음 기회가 어디였겠습니까? 바로 겟세마니 동산이었습니다.

“이 잔을 거두어주십시오.... 이 고통당하기 싫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더 나아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유혹을 합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너무 너무 외롭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사탄은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까지도 집요하게 유혹을 합니다.


하느님한테까지도 덤비는 놈이 약해빠지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이 고백성사 한 번 보고 죽을 때까지 성인성녀처럼 살 수가 있겠는가?

피정한 번 하면서 울고불고 “주님! 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서 천사처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관 뚜껑이 닫힐 때까지~~끊임없이 버러지처럼 달려드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과천대공원의 동물사육사를 제가 아는데 그 양반이 저에게 그런 얘길 했습니다.

“신부님, 동물원에 구경 오는 여자들이 제일 오래 머무는데 가 어느 우리 앞인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분이 웃으면서 여인들이 제일 오래 동안 머무르면서 유심히 들여다보는 데가 바로 뱀을 기르는 사육장이라고 그럽니다.

통계가 그렇게 돼있데요. 왜 그럴까요?

여자들이 뱀을 보면 ‘어이구 어이구 무서워!’  되게 무서워하면서도 또 이렇게 그 앞을 떠나지 않는데요. 비단구렁이, 뭐 오만 구렁이 앞에 여자들이 항상 몰려있데요. 왜 그 앞에서 떠나지 않을까?

인류를 유혹했던 그 뱀이 저주스러워서 뱀과 저항하기 위해서 그 앞에 서있는 걸까요? 아니면 여인의 첫 조상인 하와처럼 달콤한 유혹에 빠지고 싶어서 그 앞에 서있는 걸까요?

어찌 뱀의 유혹 앞에 서있는 사람이 어찌 여인뿐 이였겠습니까? 모든 인간, 모든 크리스천은 언제나 유혹 앞에 노출이 되어있는 약한 존재입니다.


뉴욕에서 한 죄수에게 무려 315년이라고 하는 징역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무슨 죄를 졌기에 315년형을 받았겠습니까? 쌤의 아들로 알려진 살인범, 데이비드 리코비치라고 하는 이 사람은 무려 여섯 명을 살해하고 일곱 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판사가 “할 말이 없느냐?” 했을 때  뭐라고 한마디 했느냐?

“살인을 할 때마다 내 속에서 어떤 악령이 나를 충동질 하는 것은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건 사탄의 장난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사탄은 때로 천사로 가장할 수도 있고~~아주 강한 힘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아주 현명한 거처럼 보여 질 수도 있고~~계획적으로 사람을 망가뜨린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악마가 우리들에게 입히는 피해는 크게 세 가집니다.

첫 번째, 가계로부터 내려오는 어두움을 이용하여 그 집안을 파괴시킵니다.

그 집안에 자살자가 나오게 하고/ 미친 사람이 나오게 하고/ 난봉꾼이 나오게 합니다.  가계로 치고 들어오는 사탄의 장난이 분명히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한 개인의 나쁜 성향, 악습을 치고 들어와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쾌락에 탐닉하게 만듭니다. 한 인간을 완전히 절단 냅니다.

세 번째는 몸의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 와서 병을 일으키게 하는 병마도 있습니다. 가계로부터 들어오는 마귀나 한 개인의 악습을 치고 들어오는 마귀나 뭐의 약한 부분을 치고 오는 마귀나 마귀들의 목적은 뭐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망가트리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결국에는 저속한 동물적 본성대로 살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삶은 돈에만 집중되어 있고~~쾌락에만 집중되어 있고~~

자기만을 위해 쌓아 놓고 쉬고 먹고 마시고 죽기 위해서~~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마침내 사탄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반역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충동합니다.

회개를 만류합니다.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 범죄를 촉발시킵니다. 좁은 문으로 못 들어가게 하고 넓고 편한 문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한 인간을 영원히 멸망케 하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주님은 그 유혹에 접했을 때 단 두 마디로 물리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내가 요즘 왜 이러지~~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어두울까! 우리들은 그 싸인을 압니다

뭔가 어둠이 나를 지배하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요즘 내가 왜 이런 분노가 일어나고 있을까! 왜 저 인간이 자꾸만 미워지기 시작할까! 왜 저 사람 죽이고 싶어!

그런 어둠이 올 때마다 예수님이 하셨듯이 <사탄아 물러가라!> 가능하면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씩 외치십시오,

술만 먹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신부님이 그랬다고 코앞에다 대고 “사탄아 물러나라!” 했다가는 귀퉁뱅이가 날아가고 쌍코피가 터집니다.

그럴 때는 속으로 하십시오. 대놓고 하지 마시고~~^ㅇ^


좁은 문으로 ,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때 ,방해하는 사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물리칩시다.

악마와 싸워 이기는 사순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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