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5주일(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2013. 3. 17. 오전 7:45:43

글자


2013년 317일 사순 제5주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 요한 8,1-11) 

2

“Let the one among you who is without sin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Again he bent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생활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당신 백성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시려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희망을 가지라고 촉구하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아 지난날 자신이 자랑삼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길로 들어선 그는 목적지인 하늘 나라를 향해 묵묵히 달려갈 뿐이다(제2독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서 있다.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지난날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지난날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시며 그녀를 보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돌을 움켜쥐고 간음한 여인을 향해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수 있었고 비로소 왜곡된 정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자리에서 떠나 버렸지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생각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용서받아 지난 잘못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달랐습니다. 군중이 모두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여인은 끝까지 예수님께 남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홀로 남겨 두고 조용히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군중과 달리 죄를 깨달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학가인 로이 레신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생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업가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사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오락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셨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세주의 자비를 청하며 회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지난날의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감동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알려질 리 없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겠습니까? 용서입니다. 여인과 함께 위선의 남자들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율법에서 간음은 사형이었습니다. 하늘의 벌이 내릴까 봐돌을 던져 죽게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거해 버림으로써 재앙을 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끝내십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반대하시면 율법을 어기시는 것이고, 묵인하시면 용서를 외치시는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고발인뿐 아니라 구경꾼의 가슴까지 철렁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니, 오늘의 우리까지 서늘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뒤 그분께서는 무엇인가 땅에 쓰셨습니다. 악의에 찬 질문 앞에서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배려입니다. 마침내 고발하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았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은 되돌아와서 삶을 축복으로 감싸 줍니다.

☆☆☆

 오래전 미국 뉴욕의 한 법정에서 빵을 훔치다 잡힌 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을 굶주리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디기가 어려워 상점에서 빵을 훔쳐 나오다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피고는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개인적인 욕구를 절도라는 범죄의 방법을 통해 충족하려 했으므로 이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바, 벌금 100불을 선고합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하루 한 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저 벌금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런데 판사의 선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피고가 자신의 굶주림을 이러한 방식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든 본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사실 이 피고의 죄를 용인한 사회적 공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벌금을 본인과 배심원 여러분들에게 함께 부과하는 바입니다.”
판결문을 다 읽은 재판관은 즉시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몇 달러를 꺼내 모자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배심원들에게 돌려진 이 모자에 담긴 벌금, 아니 성금은 이 가난한 죄인이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의 지혜가 담긴 이 판결은 참으로 모범적인 판례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자 돌로 치시오.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3독서 모두 지난 일, 고통의 과거, 잘못된 생활을 떨쳐 버리고 희망을 지니며 살라는 믿음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제2이사야의 말씀입니다. 바빌론의 유배를 끝낸 유다인들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무너진 성전, 폐허가 된 예루살렘, 부서진 성곽, 여기서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망막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유는 비싸고 귀한 것이지만 이제는 노예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할 더 큰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기적을 행하신 야훼 하느님을 상기시킵니다.

 

갈대바다를 맨발로 건너게 하신 야훼,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 주신 하느님, 이집트의 병거를 갈대바다에 빠뜨려 멸망케 하신 야훼, 하느님 그분을 기억하며 새로운 힘을 얻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러한 과거에만 집착치 않고 더 큰 희망, 큰 꿈을 지니라고 외칩니다. 화려한 과거, 자랑스러운 지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겨내는 믿음과 희망이 더욱 위해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더 큰 미래, 더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것을 능가하는 전혀 새로운, 그리고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겨울이 지난 초봄의 싹, 이것은 분명 희망의 상징이며 삶의 보증입니다. 사막과 광야에 큰 길이 뚫릴 수 있고 또 물이 샘처럼 솟아 비옥한 땅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막과 광야에서 일어날 기적, 그것은 바로 유다인에게, 아니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적, 은총의 기적인 것입니다. 사실 자유와 해방을 맛 본 민족은 그 경로가 아무리 험해도 큰길처럼 기쁘게 그리고 단숨에 뛰어넘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희망을 지녔고 희망이 보이고 희망이 보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보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의 어려움들을 뛰어넘어 은총의 샘물이 철철 넘치는 기적의 나, 내일의 나를 창조하며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의 말씀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체험입니다. 크리스찬을 박해했던 바오로는 예수를 체험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송두리째 맡기고 투신했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믿음으로 모두에게 신념의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다 쓰레기로 여기면서 확신에 찬 삶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영광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한 바오로는 그러나 교만치 아니하고 현실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공헌하지도 않으며 아직도 자신은 앞으로 계속 달음질쳐야 할뿐이라고 새롭게 믿음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반복, 더 크고, 더 앞에 있는 것을 붙들기 위해 부단히 달음질치는 자세,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빠스카 신비는 이러한 긴장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주변에 눈길을 두지 말고 전심전력 앞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뛰어야 합니다. 숨가쁘게 그리스도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인간권리가 보장받는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그리고 감옥에서 숨져 가는 우리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통의 현장 감옥으로 달음질쳐야 합니다. 그곳을 넘어서만이 부활과 영광, 기쁨이 실현될 것입니다.
 

  
 

아, 사도 바오로여, 당신처럼 높은 곳을 향하여 그리고 갇힌 자를 구출하기 위하여 용감히, 조금도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달음질치도록 우리 모두를 재촉하소서.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자비로이 용서하시며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시는 예수의 사랑을 들려줍니다. 당시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간음한 여인을 잡아 온 것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하며 예수의 가르침대로라면 살려야 하는데, 어찌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대답하면 그 여인은 죽어야 하므로 예수의 판단을 잔인하다 할 것이고 자비로이 살려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한 계략입니다. 비슷한 계략을 우리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서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태 22,15-22 참조).

 

예수는 이러한 함정에 걸리지 않으며 법과 제도를 훨씬 뛰어넘는 새롭고 근원적인 가치를 제시하십니다. 예수는 사목적 대답을 주십니다. 즉 법적인 판결과 집행에 앞서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강론을 듣거나 복음을 읽어도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 나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 죄녀를 잡아와 법대로 돌로 치라고 외치는 나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자비로이 용서해 줄 나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부끄럽게 끌려온 죄녀로서 누구의 손길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위기와 절망에 처한 이 여인에게 그 누구도 예측 못했던 새로운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현재 그리고 어떠한 내일을 설계해야 하는가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빠스카의 이 깊은 신비를 새로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부활을 체험케 하소서. 아멘.
 



돌직구’를 날리신 예수님!
 

-김영국신부-

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자신의 죄를 살피고 고해성사를 통해 부활 대축일을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야기는 과거의 죄를 캐묻고 처벌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롭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아주 편리한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에게는 유리하게(마르 7,9-13 참조) 타인에게는 가혹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어처구니없이 주절대기도 합니다.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거리낌 없이 교류하고, 안식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하시는 예수님이 이들에게는 눈에 든 가시였을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라는 기막
힌 올가미를 사용하여 예수님까지 제거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쳐죽이는데 동의할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명백한 현행범을 그냥 용서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돌팔매질에 대한 열정은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해서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파헤치고, 때로는 근거 없는 소문을 무차별적으로 퍼뜨려 치
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무언가를 쓰시면서 숙고의 시간을 버십니다. 예수님은 땅에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6,37) 아니면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라고 쓰셨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기보다 이웃을 단죄하는 일에 더 적극적입니다. 이웃의 잘못에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메마른 인간들에게는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의 존재가 너무나 불편했을 것입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끈질기게 재촉합니다.

예수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시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돌직구’가 되어 진짜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정확하게 꽂힙니다. 그토록 확신에 찬 행동을 보이던 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 앞에서 ‘돌’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부터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객관적인 율법의 요구와 그 적용만이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돌직구’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자백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는 죄짓지 마라.”(루카8,11)는 말씀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여인을 진심으로 믿어주고 앞으로 잘 살라고 격려하십니다.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악의 세력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을 주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드러납니다. 이 시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화를 내고 못된 사람이라고 욕합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할 때도 있습니다. 더더구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고 상대는 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작 자기도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은 잊고 삽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는 성인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모튼 켈시).입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하고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위선자가 됩니다. “여자를 돌로 치지 마시오.” 하고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야말로 고약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까요? 아니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쓰셨을 까요?’ 어찌 되었든 무엇인가 쓰고 계실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그들은 과연 자신이 돌을 던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여인을 단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냉정하게 심판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로마3,10-16). 하늘 아래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을 던지지 않고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통회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통회하느냐에 따라서 용서의 체험도 달라집니다. 깊이 통회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그만큼 깊이 체험할 것이고, 적게 통회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체험할 것입니다(송봉모).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성실한 양심성찰과 통회,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수를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기억하시죠?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했습니다. 꼭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와 있어서,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 거기에 와 있어서 놀란답니다. 우리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편협한 비판이나 판단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성인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평생 소원은 다시는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 이 기도를 들은 하느님께서 크게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은총을 구하는 구나. 그런데 내가 그런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용서해줄 수 있단 말이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한계와 죄스러움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자비로움으로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단죄했던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가타 성경을 만든 예로니모 성인은 오랜 세월 성욕에 시달리며 살았답니다. 성인은 성경번역에 더욱 열정을 쏟아 넣어 자신의 정욕을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사랑하는 예수님, 제 정성을 다하여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기뻐하실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아기예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수도자라 가난하지만 마침 어떤 이가 좋은 곳에 쓰라고 돈을 주었는데, 드릴 터이니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돈은 그대가 직접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는 돈이 필요없으니까.” 그런대도 예로니모가 계속고집하자 예수님께서는 웃음을 거두시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을 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죄와 욕망을 나에게 주어라. 내게 필요한 선물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너의 죄와 욕망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시 죽을 것이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은 없으니.” 예로니모 성인은 이 환시체험 후 두 번 다시 성욕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려 자비를 입고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순 제 5주일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사람을 살리는 법과 죽이는 법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같은 법을 바리사이들은 죽이기 위해서 적용했고, 예수님께서는 살리기 위해서 적용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음한 이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여인을 용서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자 하십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죄인으로 단정 짓고 심판하는 데 아주 느리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하시는 데 아주 빠르셨지요. 사람들이 여인을 처벌해 달라고 재촉을 해도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인이 미처 청하기도 전에 용서하고 계시지요. 우리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십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리사이 성향에 더 가까운지, 예수님의 성향에 더 가까운지 우리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제자입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바리사이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 제자라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 남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고, 용서하는 데는 끝까지 무신경한 바리사이 적 모습이 우리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묵상할 것은 단죄나 처벌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끝까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묻고 처벌을 했다면 그 여인은 아마도 돌에 맞아 한을 품고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여인의 삶은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새로운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자비와 사랑의 모습보다는 성급하게 단죄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트집 잡아서 미래까지도 막고 마는 바리사이 성향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반성할 것을 촉구합니다.

헝가리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어느 시골을 여행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그 마을 극장에서 리스트의 제자라고 하는 여류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트는 그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리스트의 숙소로 어떤 젊은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리스트를 보자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했습니다.

"유명한 분의 이름을 빌지 않으면 연주회를 열어도 올 사람이 없기에 무례하게도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연주회는 중지하겠사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 여인에게 연주를 시키고 주의 깊게 들은 후 연주법에 대한 자세한 주의를 주고 잘못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지금 나는 당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소.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문하생이 되었고, 리스트의 제자로서 연주회를 열어도 좋으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연주회에 스승인 리스트가 특별 출연한다고 알리시오."

리스트는 제자를 사칭한 여자의 잘못을 덮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선물까지 베풀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동한 이 여인은 리스트를 존경하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리스트가 화를 내어 여자를 단죄하고 망신을 주었다면 아마도 여자는 리스트를 평생 원망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죽을죄를 지은 여인을 사랑으로 감싸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 주셨습니다. 단죄는 천천히, 용서는 청하기 전에 먼저 행하신 예수님 사랑이 사람을 살렸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요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울대 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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