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3. 4. 6. 오후 2: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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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 주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수 부활 대축일의 다음 주일, 곧 부활 제2주일은 전통적으로 ‘사백 주일’로 불리었다.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세례 받은 이들이 영혼의 결백을 뜻하는 흰옷을 입고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에 벗었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 오늘은 부활 제2주일로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비가 온 누리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의심 많은 토마스에게 몸소 나타나시어 믿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비록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믿음이 나약한 우리에게 늘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의 마음을 바칩시다.


[말씀의 초대]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가운데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 간다(제1독서). 박해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파트모스의 요한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의 권력보다도 당신의 주권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제2독서).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을 직접 보고 믿게 하신다(복음).



[복음말씀]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19-31)

[오늘의 묵상]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의 말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지선’이라는 젊은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대학생이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한 음주 운전자가 낸 추돌 사고로 온몸에 크나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은 건졌으나 건강도, 미모도, 희망찬 미래도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십여 차례의 힘든 수술을 견디어 내고 자활에 성공하였고, 현재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서전 『지선아 사랑해』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이겨 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상처에서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지선 씨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정직한 믿음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 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 합니다. 어째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 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향해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부활은 믿음의 완성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제2독서 묵시 1,9-11a.12-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초등학교 교리반에서의 일입니다. 5학년 남자 아이가 혼자서 키들키들 웃더니만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수녀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때 천당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하여 교리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꼬마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천당은 양로원과 똑같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수녀님이 "왜?"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천당은 늙고 병들어 죽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빨 빠진 할머니, 대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들만 사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아요."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막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고 수녀님의 교리지도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실 안이 한참 어수선할 때 조그만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하면서 나무라더니 천당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한 분도 계시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네가 어떻게 아니?"하고 대들었습니다. 이때 소녀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파띠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이나 루르드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은 다같이 젊고 예쁜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성모님은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천당에서는 살아 계실 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신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분들 생애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당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거기서 탄복을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발현하셨을 때의 성모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분명히 아주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그렇게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대전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잃었던 부분은 거기서 다 찾을 것이며 미완성이었던 모든 것은 거기서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세상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구자, 가난한 병자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산다 해도 그는 분명히 하느님 나라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 서의 삶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어떤 소년이 있는데 그는 신체적인 불구뿐만 아니라 부모가 그를 버렸다는 아픔의 상처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행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했으며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종일 엎드려 지내는 세월이지만 입으로 책장을 넘기며 성서를 보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 엉망이 됩니다. 막말로 개판이요 요지경이 됩니다. 세상은 그리고 세상 끝까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완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그러나 완성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고 미래를 닫아 놓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래서 불행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는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마만 빠진 것을 보면 그는 아마 믿음의 일을 제치고 다른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쏘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허탕을 치고 우연히 제자들에게 왔을 때 그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고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하고 자기 손을 주님의 상처에 넣어 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토마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거부감 은 오히려 그가 강하게 믿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다시 사시기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토마는 소원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소원도 성취시켜 주었습니다. 강하게 믿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우리의 갈증 을 채워 주었으며 우리의 불안을 제거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 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행복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부조리의 세상에 대한 해답이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두근거리게 기쁜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한다 해도 그 나라에서 다 보상받을 일을 생각하면 세상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따라서 정말 복되게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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