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1열왕 17,17-24 제2독서 갈라 1,11-19 복음 루카 7,11-17
▦ 오늘은 연중 제1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이 기적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살려 내셨다는 사실보다도,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하여 깊은 연민과 자애심을 지니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내어 드리도록 합시다.
사렙타에 사는 한 과부의 아들이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인 엘리야 예언자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아이를 다시 살려 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교회를 몹시 박해하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케파’라고도 부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를 만나 사도가 되었다(제2독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한 과부를 만나셨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어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을 찬양한다(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7,11-17 +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의 앞바다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그리스도상이 잠겨 있는데,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제노바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닷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를 회상하며 주로 그 부모들의 헌금으로 이 조각을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상은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낮은 곳에 내려오시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보시게 됩니다. 죽은 이는 젊은이였고, 그의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는데, 그녀는 그나마 아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누구인가 청했을 때에야 예수님께서 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먼저 나서십니다. 그리고 과부를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연민과 자애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12,15).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시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시니, 우리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보시게 됩니다. 죽은 이는 젊은이였고, 그의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는데, 그녀는 그나마 아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누구인가 청했을 때에야 예수님께서 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먼저 나서십니다. 그리고 과부를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연민과 자애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12,15).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시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시니, 우리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오전 11시,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저는 라디오 채널을 105.3(서울 지역)으로 맞춥니다.
존경하는 안병철 신부님의 ‘성서 못자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명쾌하게, 때로 자상하게, 때로 아주 쉽게, 때로 아주 감명 깊게 진행되는 신부님의 신약성서 강의를 듣다보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며칠 전 방송에서 신부님께서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관련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강도가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겪는 슬픔의 깊이가 아무리 깊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 아물고, 다 지나간다는 요지의 말씀을 이렇게 해 하셨습니다.
장례식 미사를 집전하다보면 어떤 유족들의 슬픔은 하늘을 찌릅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고통과 상처가 너무나 커서 정신을 잃기도 합니다.
쓰러지기도 합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상처가 너무 깊어서 울부짖는 분들을 바라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따라 죽겠다’ 하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1년 후 쯤에 그 ‘따라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보면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을 많이 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슬픔은 세월과 더불어 천천히 치유가 된다는 신부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의 과부가 직면한 슬픔은 보통 우리가 겪는 슬픔과는 질적으로 다른 슬픔, 그 색깔이 완전히 다른 슬픔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유다 사회,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다는 것, 그것만 해도 거의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내 홀로 경제적 독립이 힘들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과부가 겪었던 고초는 지금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부에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었다면 유일한 피붙이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외아들은 유일한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과부는 그저 그 외아들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과부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겠지요. 초상을 치루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과부는 더 이상 살아 갈 힘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과부가 겪은 그 짙은 슬픔, 한없이 깊은 심연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함께 눈물 흘리십니다.
따듯한 위로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울지 마라.”
그리고 과부에게 다시 한 번 새 삶을 허락하십니다.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던 과부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외아들을 살려주심으로서 외아들뿐만 아니라 어머니 과부까지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과부의 깊은 슬픔에 연민을 느끼고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우리가 착하고 모범적이어서, 우리가 선행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랑해주시고 구원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결핍, 부족함, 불쌍함, 측은함, 처량함, 한심함, 한계점, 죄, 상처. 이런 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어쩔 수 없이 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은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품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드릴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이 부족함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제 이 나약함을 어여삐 보아주십시오.
제 깊은 슬픔을 외면하지 마시고 제게 다가와 주십시오.
†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작년에 사랑하는 친구가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참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안 친구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아파하면서 그들이 새 정을 꾸밀 수 있도록 자신이 멀리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말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내는 ‘무엇을 주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 좋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한테는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엄마요 아내라고 말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옵니다.
저는 다음 기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자녀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큽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자녀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되살려 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고 다시금 우리 품에 안겨주신 날입니다.
송 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