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19-23)성령을 받아라

2013. 5. 19. 오전 7:37:49

글자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요한 14,15-16.23ㄴ-26>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두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시는, 곧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여러 은사들을 한마디로 대신한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바로 이 ‘일치성’입니다.
성령의 본질이 이러한 ‘일치성’에 있다는 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던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신 뒤, 제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려 모인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치의 성령에 힘입어 모두 각자의 언어로 설교를 듣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한 ‘분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일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는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기원하시며 성령을 내려 주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하신다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놀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히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곤만드레 취한 한 남자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곧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신부가 안에 있다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 고해실의 작은 가림 막을
똑,똑,똑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그 쪽에서 말했습니다.
노크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쪽에도 휴지는 없어요!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술 취한 사람과 성령에 취한 사람이 비슷하답니다.
말수가 는다.
노래를 한다.
권한다.
운다.
용감해 진다.
지배당한다.
중독된다.
안주가 필요하다(말씀).
냄새를 풍긴다.(성령을 받은 사람은 향기를 풍기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에 서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에 서의 믿음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 문장에서 사용한 믿음의 의미는 사실 믿음이라기보다는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실제로 못 자국이 있는 예수님의 손바닥과
상처 난 옆구리를 눈으로 직접 보고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경우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인’하였거나 ‘알아차린’것이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지, 결코 믿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식의 결과일 뿐이지 믿음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에 서의 믿음이란
진정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믿음은 감각과 지각의 영역을 넘어선 순수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때의 부활은 순수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 주님께서 오감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까닭은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써 당신을 알아보기를 바라시기 때문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곧, 우리 눈앞에 당신이 나타나시거나 실제로 당신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밖에 주님을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지 않고도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 ☆ ☆ ☆ ☆ ☆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과 다릅니다.
1+1=2라는 사실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안다고 말합니다.
이미 증명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이 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 또는 처음 보는 장사꾼이 정직한지는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믿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믿음은 확률을 가지고 계산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마에서 그 말의 성적이 평소에 좋았기 때문에 우승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런 계산과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기 위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자기에게는 특별히 잘 해 주시기를 원하고 때로는 기적을 요구
하기도 합니다.

토마 사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도 예수께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을 믿기로 결심했으니 내 계산과 다르더라도
항구하게 따라갑시다.


☆ ☆ ☆ ☆ ☆ ☆


이야기

◈ 믿음이 있기에! /고도원의 아침편지

'나를 신뢰한다.'는 말의 참뜻.
믿음은 우리가 골라가질 수 있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뭔가를 해야 하는 어떤 행위인 것이다.

즉 기꺼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미지의 것을 하나의 모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여행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다음 순간에 다가올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 샤론 샐즈버그의《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부터 믿어라》중에서 -


◈ 믿음은 사람의 몸과 마음과 혼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생명 에너지입니다.
그 어떤 미지의 장애물도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장애물이던 것들도, 믿음이 있으면
그 장애물이 오히려 디딤돌로 바뀝니다.
믿음이 있기에, 오늘도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 ☆ ☆ ☆ ☆ ☆

기  도

주 님,
저희의 인생여정에는
힘들고 따분하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치고 좌절할 때마다 저희는
쉽게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주님께 탓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죄송스러운 것은
주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늘 주님 편에 설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 ☆ ☆ ☆ ☆

-최민순 신부님-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 ☆ ☆ ☆ ☆ ☆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詩:최민순신부/曲:김베드로/音:하나로]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기양신부-
물으면 대부분 신자들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 정도입니다.
"성신이요."
많은 분들이 성령은 성령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 또 성령 세미나에 열중한 사람들은 성령을 마치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 세미나의 일부 과정에서 사람들이 성령에 도취하여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성령과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성령이 무서워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지요. 성령은 나와 상관없는 분이 아니고 성령 세미나를 하는 일부 신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고, 나의 전 생애를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살아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은 비둘기 형상이나 바람, 또는 숨이나 불혀의 모습으로 내려오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성령은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형상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은 그 시작부터 성령의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임신 사실을 알리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응답합니다. 그 때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즉,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왔으며, 마귀를 물리치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다른 협조자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렇게 약속해 주신 성령은 오순절이 되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사도 2,2-3)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서도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오늘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 문을 박차고 나와 유다인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성령의 지혜를 받은 제자들 언변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쩔쩔 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등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을 행해 보였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사도 5,15) 바랄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힘을 갖습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령에 가득 차서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교회를 태동시킨 분이시고,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는 생명이시며, 우리 신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는 개인이나 단체 또 교회 공동체는 단지 인간 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칠성사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며 밀떡이 예수님의 성체로 변화할 때 사제는 그 위에 손을 얹으며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성 변화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만물을 거룩하게 하고 인간의 경지를 넘어 천상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은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동반자 성령

 -양승국신부-

 요즘 형제들과 밭을 빌려 농사를 조금 짓고 있습니다. 다들 '왕초보'라 문제가 많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기는 하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옵니다. 이것저것 모종을 심기는 하지만 간격도 안 맞고, 또 뭔가 어색합니다. 보다 못한 '프로'들께서 한마디씩 거드십니다.

 "자네들, 무슨 모종 장사할 일 있어? 고추모종을 왜 그렇게 빽빽하게 심었어? 그리고 저기, 호박모종을 이랑 한 가운데다 줄줄이 심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뭔 야채 박람회야? 상추, 케일, 토마토, 가지, 오이, 쑥갓… 없는 게 없구먼,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자주 야단을 맞다보니 저는 가급적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제일 먼 쪽에 앉아 일하지요. 요즘은 꽤 키가 커진 고추모종에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 고추모종들을 하나하나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또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 손길이 아마 이러했겠지요. 제대로 걸어 다닐 힘조차 없어 비틀거리던 나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지척에서 따라다니시던 분, 혹시라도 넘어지면 비호처럼 달려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던 분,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던 분… 돌이켜보니 많은 경우 그런 하느님 손길은 마치 미풍처럼 불어오는 성령을 통해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성령께서 내 안에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란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진지해지더니 나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다들 걸어가는 넓은 길을 굳이 마다하고, 이 좁디 좁은 길을 택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후배들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름대로 꽤 많은 영적진보를 이뤄냈다는 마음에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신앙, 하느님과 관계를 총정리 하는 '영적자서전'을 써나가면서 평소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굽이굽이, 곳곳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음에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막막해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심각한 성소의 위기 상황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는 형제들로 변장하고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로해주시고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죄로 기울어져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오랜 방황 속에 허덕일 때,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조금 빠져나와서 바라다보니 손을 내밀어주시던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늦게나마 성령의 손길, 성령의 자취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둔감해서, 우리가 너무 육적으로 살아서 잘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손 내밀면 언제라도 잡아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오신 분이 성령이심을 인정합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 있기에, 우리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주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울 때 바람을, 슬플 때에 위로를.
지복의 빛이시여, 우리 맘 깊은 곳을 가득히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면 우리 삶 그 모든 것 이로운 것 없으리.
허물을 씻어주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 고치소서.
굳은 맘 풀어주고 찬 마음 데우시고 바른길 이끄소서.
성령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이에게 칠은을 베푸소서.
공덕을 쌓게 하고 구원의 문을 넘어 영복을 얻게 하소서. 


 


성령의 참 좋은 선물

 -성령예찬-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와 조배 드리세.”

 주일 새벽, 여기 수도승들은 성령강림을 한 마음으로 경축하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이어 방금 전 화답 송 후렴으로 우리 또한 성령강림을 경축했습니다.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어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온 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성령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우리의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올해의 성령강림 대축일의 위치가 참 오묘합니다.
5.17일 석가탄신일과 5.19일 성령강림대축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5.18일 민주화 운동의 날이 흡사 부처님과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5.18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 이은 오늘 새벽,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한 우리 여기 수도승들의 하느님 찬미의 성무일도가 유난히 힘찼습니다.

성령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 새벽 3:30분 갑자기 엘리야 수사가 찾아왔습니다.
동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병원에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수도승들은 5:50분부터 6:40분까지 성령 충만한 분위기에서
거의 1시간 동안 주님을 찬미했고 이어 저는 6:43분 엘리야 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테레빈 제 동생이 6:30분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동안 약 3년간 암으로 투병 중이던 엘리야 수사의 동생 테레빈이었습니다.
울먹이며 전화하든 엘리야 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유리 테레빈은 하늘나라에 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여기 수도승들의 성령 충만한 하느님 찬미의 기도 중에
임종을 준비하다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생각이 들으니
새삼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주님의 위로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소원이,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소원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좋으신 주님은 우리 모두 성령의 선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고자
이 은혜로운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축제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첫째,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은 소통과 일치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려 불통과 분열입니다.

소통과 일치가 공동체의 이상이라면 불통과 분열은 공동체의 현실 같습니다.
불통과 분열로 몸살을 겪고 있는 공동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라, 학교, 회사, 가정, 교회 등 끝이 없습니다.

바로 불통의 벽을 무너뜨리고, 분열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처방은 오직 하나 성령뿐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바로 이런 성령을 받을 때 비로소 불통의 벽은 소통의 문으로, 분열은 일치로 바뀝니다.  성령만이 공동체는 물론 개인을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성령 강림과 더불어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심으로 완전 소통으로
일치의 공동체가 성취됩니다.

사도들은 여러 나라 말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장엄하게 선포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니 하느님과 완전 소통이요
말은 다 달라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들으니 다 서로 간 소통입니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소통과 일치입니다.

 둘째,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은 평화와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성령을 받을 때 비로소 평화와 기쁨입니다.

평화와 기쁨이 이상이라면 불안과 슬픔은 현실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불안 중에 살아가는 지요.

아무리 부유해도 소유가 행복을, 기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걱정과 불안, 두려움 중에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참 평화입니다.
성령을 통해 선사 받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내적평화입니다.

 성령은 흡사 효소 같습니다.

온갖 과일을 발효케 하여 향기로운 술이 되게 하듯
성령의 효소가 불안과 두려움을 평화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킵니다.

미사를 통한 주님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이 기쁨 역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과 만남으로부터 샘솟는 성령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와 비교될 수 있으며 모든 죄를 씻어 버립니다.
기쁨은, 완전한 기쁨은 하느님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바알 셈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기쁨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다.”

 주님 주시는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셋째,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이 참 좋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끊임없이 타오는 사랑의 불입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성령입니다.
사랑 중에 으뜸이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넣으며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에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인간 창조가 연상됩니다.
바로 성령으로 인한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끊임없이 재창조 되면서
하느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용서하는 사랑이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이런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용서는 그대로 하느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반영합니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 사랑과 용서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고자,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에 우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소통과 일치, 평화와 기쁨, 사랑과 용서의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평화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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