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왔는데,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뜻이 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대한다. 그리고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안티오키아에 바오로 사도의 일행을 파견한다(제1독서 사도행전15,1-2.22-29) 파트모스의 요한은 환시를 통하여 천상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곳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났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어 비추어 주고 있다(제2독서 묵시록 21,10-14.22-23).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며, 보호자 성령과 함께 평화를 남기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한복음14,23-29).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3-29<또는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유다인 지혜의 저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최초의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고 적혀 있다.
로마 황제가 한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하느님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어 있을 때 허락도 없이 뼈를 떼어 갔는가?’ 라고 말했다. 이 때 옆에 있던 랍비의 딸이 말참견을 하였다.
‘황제의 부하 중 한 사람을 좀 빌려 주십시오’ 좀 어려운 문제가 생겨 조사시켰으면 하는데요. 라고 했다.
황제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냐? 고 물었다. 그 딸은 ‘실은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훔쳐 갔는데 그 대신 도둑은 금 그릇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조사하여 연유를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라고 대답했다.
황제는‘그것 참 부러운 일이로군. 그런 도둑이라면 내 집도 털어 갔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의 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 일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갈비뼈 한 대를 훔쳐가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여자를 남겨 놓으셨으니 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 계신 곳으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남겨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십자가상 죽음의 길로 떠나게 되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에게 평화를 선물로 내려 주십니다.
평화는 전쟁이 멈춘 상태와 같은 평화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권력과 부귀를 통한 평화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국,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평화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나약하고 겁 많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협조자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늘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박해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오늘의 제1독서(사도 15,28)에서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초대 교회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늘 주님이 남겨 주신 평화를 인사하고 나 눕니다. 형식적인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가정과 이웃 안에서 용서의 마음과 진실이 담긴 ‘평화’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랑 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 지영 신부-

부활6주일에 조제형루가신부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 중에는 일상의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피정 중에는 주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피정과 휴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피정은 수동적인 면이 많습니다. 교구에는 사제 평생 교육원이 있고, 그곳에서 사제들의 피정 신청을 받습니다. 사제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피정을 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휴가는 능동적인 면이 많습니다.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갈 동료를 구하고, 장소를 정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휴가는 내가 좋아서, 원해서 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휴가를 다녀오면 몸도 마음도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비용도 많이 들곤 합니다. 수동적인 피정은 오히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마음이 맑아지고, 정화되는데, 능동적인 휴가는 지치게 하고, 간혹 친구들과 다투기도 하고, 후유증이 남기도 합니다. 제가 제대로 된 휴가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능동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수동적인 것일까요? 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내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힘을 주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이분은 40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이집트의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야 했고, 미디안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장인의 집에서 양을 돌보면서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낸 모세는 이제 또 다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모두 뺀 모세에게, 앞날에 대한 희망까지도 포기한 모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했다면 광야에서의 40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모세는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피정을 하는 것은, 신앙을 갖는 것은 이제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영화관에서 영화 보듯이 일주일에 한번 성당 구경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화는 미리 와서 좌석 확인도하고 예고편도 보고, 예매를 하기도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하는 자세가 적어도 영화 보는 정도의 정성보다는 더 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선과 아집, 권위로 군림하려는 일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밤을 새워 우리를 지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 신음하는 형제들 보다는 외형적인 성장에 만족하는 교회의 장상들이 있습니다. 신도 수가 몇 명인지, 헌금은 얼마인지, 교구 납부금은 얼마인지 이런 숫자에는 민감하지만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은 몇 명인지, 고통 중에 방황하는 사람은 몇 명인지, 가정 방문이 필요한 교우는 몇 명인지 모른 경우는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제 1독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을 잘 지키는 협조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칙은 사랑, 겸손, 희생입니다.
둘째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셋째는 소중한 것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부모, 가족, 이웃, 본당 공동체, 건강입니다.
넷째는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2개이고, 입은 하나인 이유는 한번 말하기 전에 두 번 들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갈등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다섯째는 몸과 마음을 단련 시켜야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는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영적으로 강해진 우리는 주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그동안 계속 이야기 하였듯이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 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약속 (요한 14,23-29)
이 세상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주님은 오늘,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의 참 모습을 밝히십니다.
그는 첫째로 말씀을 귀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둘째로 받아들인 말씀을 하나하나 되새겨서 생활과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
그런데 주님은 오늘 이 두 가지 일에 협조해 주실 분은 성령이라 이르시며 또 이 성령을 보내 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14,26).
그런데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생활에서 동떨어져 나가 멀어져 가고 있으며 점점 희미해져 가면서 잊혀지고 있지나 않은지요? 혹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마저도 이미 사라져 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 마음은 썩어 없어질 재물에 깊이 맛들여 눈을 팔고 넋을 잃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마음과 정신이 산란해지고, 번거롭기만 하고 예기치도 않은 근심 걱정이 덧붙여지는 등 결국은 허탈감 속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요?
이 속세의 물욕이 우리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서시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위해 꼭 필요함을 주님은 지적하십니다(16,7-13). 그러니 우리는 굳게 닫혀 있을지도 모를 우리 마음의 문부터 활짝 열어 마음에서 재물욕을 몰아내고, 그분을 영접하여 모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께 마음의 장소를 마련해 드릴 때, 그분은 영원히 생활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활을 보장해 주실 것이 틀림없으며(14,16), 지금 현세에선 온갖 불안과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낼 참 평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마음의 진실한 참 평화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14,27).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하도록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14,15-16)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처하게 해주시고(14,23) 두터운 사랑을 받게 하시며(14,21) 영생의 보장까지도 받게 하십니다(14,16). 또 이 세상에선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14,27).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명심하여야 할 점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신 다음에도 우리 마음이 소란하거나 시끄러워서는 안 되겠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조용한 가운데서 속삭이시고 잠잠히 타이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에서 물욕부터 몰아낸 다음 성령을 받아들여 성령의 불이 거침 없이 타오르게 하여야겠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5월5일 부활 제6주일 복음묵상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요한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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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거는 이미 떠난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결국 우리는 현재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현재는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동시에 만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늘 우리에게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쁨도 아픔도 두려움도 그 어떠한 감정의 단편들도 현재에만 허락된 움직임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며 현재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균형이 필요하며 그 균형은 현재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여기서 균형이라 하면, 지금의 나를 위해 과거를 올바르게 뒤돌아보고,
미래라는 다양한 가능성에 자신을 던져보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기에 현재가 좀 더 풍요롭기 위해서는 시간을 하나의 선상에서 보고 이해해만 한다.
균형을 잃을 때, 우리는 쉽게 과거에 묶여 살게 된다.
또한 미래에 대해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기도 쉽다.
그러니, 과거도 미래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과거를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거가 지금을 살아가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잘못된 방법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래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이 아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과 같은 요행이 희망으로 둔갑되어, 지금의 상황이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는
유치한 상상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참된 의미의 희망이 될 수 없으며,
그저 현재의 시간을 죽이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현재의 내 모습과 연관될 수 없는 자신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현재이다.
현재 안에서 만나는 모든 감정의 단편들, 마음의 움직임들, 관계들,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미래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 모든 것의 열쇠는 현재에 달려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미래만 바라보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미리 알려주셨다 함은 바로 지금을 제대로 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말씀이 현재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를 위한 시간일 뿐이다.
그럴 수 있을 때 미래는 복음적으로 보장된다.
‘지금 바로 여기’가’ 내가 잘 살 수 있는 기회의 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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