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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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7-30)
성소주일 > 교황담화문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50차 성소 주일 담화
(2013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
성소는 믿음에 기초를 둔 희망의 징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2013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에 거행하는 제50차 성소 주일을 맞아, ‘성소는 믿음에 기초를 둔 희망의 징표’라는 주제에 대하여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기쁘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의 해에 성소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공의회 기간 중에 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교회를 위하여 일꾼들을 계속 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며(마태 9,38 참조)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도록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때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충분한 사제를 확보하는 문제는 모든 신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줍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개별 본당과 교구 공동체들의 믿음과 사랑의 활력을 드러내는 명백한 표지이자 그리스도인 가정의 도덕적 건강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꺼이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곳에서 사제 성소와 봉헌 생활 성소가 많이 생겨납니다”(바오로 6세, 1964년 4월 11일 라디오 담화).
그 이후 수 십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교회 공동체들이 해마다 부활 제4주일에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성소의 은총을 간청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절실한 필요성에 대하여 함께 성찰해 왔습니다. 실제로, 이 뜻 깊은 연례행사를 통하여, 사제 성소와 봉헌 생활 성소의 중요성을 신자들의 영성과 기도와 사목 활동의 중심으로 삼도록 하는 힘찬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희망은 미래에 어떤 긍정적인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은 불만과 실패로 얼룩진 우리의 현재 삶에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집트 탈출 때처럼 특별히 어려운 시기에 지속적으로 한 요소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소는 특히 예언자들의 글에서 발견됩니다. 곧 하느님께서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기억은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적인 자세를 따르도록 초대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일깨워 주듯이,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구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나는 위안과 빛을 주는 진리 하나는 바로 하느님은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때부터(창세 8,21-22 참조) 이집트 탈출과 광야를 가로지르는 때(신명 9,7 참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불충과 죄악으로 거스를 때마다 그 계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토록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 외아드님의 피를 통하여 인간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모든 순간마다, 특히 가장 힘든 순간에, 주님의 성실하심은 언제나 구원 역사의 참된 원동력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언젠가 ‘약속된 땅’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으로 인간을 굳건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 모든 희망의 확고한 토대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나 당신 말씀에 성실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확고한 희망을 품고 시편 저자와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시편 62[61],6) 따라서 희망한다는 것은 계약의 약속들을 지키시는 성실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희망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믿음’과 ‘희망’이 호환되어 사용될 정도로 ‘희망’은 신앙의 중심 단어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확고한 믿음”(히브 10,22)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10,23)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의 의미이자 이유인 로고스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권고할 때(3,15 참조), 이 ‘희망’은 ‘믿음’과 똑같은 것입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확고한 희망으로 따르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 안에 부어 주십니다(로마 5,5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 이 사랑은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충만한 삶을 위하여 무엇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응답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흔히 인간이 결코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가오지만, 언제나 그 사랑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이러한 확신으로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피상적인 것을 꿰뚫는 이 깊고도 벅찬 사랑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이 사랑은 우리 삶의 여정과 미래에 희망을 줍니다. 이 사랑은 우리 자신과 역사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도록 해 줍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는 세상 끝 날까지 인간을 돌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 희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산마리노 몬테펠트로 교구의 젊은이들에게 한 연설. 2011.6.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실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 삶의 길을 함께 걸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갈망과 욕구를 지니고 자기만의 활동에 빠져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살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인 교회와 함께 사십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당신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그분에게 주도권을 드리고,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곧 가정과 일터와 개인적 관심사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도 그분께 첫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자체를 그분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매우 친밀하게 살며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고 결국 우리의 형제자매와 친교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이루는 이 친교의 삶은 우리가 희망을 체험하고 우리 삶이 충만하고 자유로워지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사제 성소와 봉헌 생활 성소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에서 나오고, 또한 그분의 뜻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분과 나누는 진지하고 확신에 찬 대화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체험을 쌓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 깊은 데에서 들려오는 그분 목소리에 내적으로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도록 해 주는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들은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에 충실한 증언을 아끼지 않으며, 뜨거운 선교 열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게 이끕니다. 이 과정은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의 거행과 열렬한 기도 생활을 통하여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매우 개인적인 것, 곧 나의 자아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도는 교회와 성인들의 훌륭한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계속 가르쳐 주고 계시는 전례 기도를 통하여 꾸준히 인도되고 빛을 받아야 합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4항).
깊이 있고 꾸준한 기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특별한 성소를 키우시어 당신 백성을 뒷받침해 주신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성소들이 이 세상을 위한 희망의 징표가 되게 하십니다. 실제로, 사제와 수도자는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사랑의 봉사를 하면서 하느님 백성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에만 생겨나는 그 확고한 희망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와 수도자는 신앙의 증언과 사도적 열정으로, 특히 젊은 세대에게, 당신을 더욱 가까이에서 따르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께 기꺼이 곧바로 응답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사제 직무나 봉헌 생활에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가장 성숙한 열매 하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에 힘입어 우리는 특별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교회의 미래와 그 복음화 임무를 바라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거행할 새로운 일꾼들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젊은이들의 ‘인생 여정의 동반자’로서 젊은이들과 함께 할 줄 아는 열정적인 사제들이 부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힘든 굴곡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요한 14,6 참조)를 알아볼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도와주는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복음적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젊은이들에게 말해 줄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열정적으로 헌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보여 주는 사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헌신은 그들 자신의 삶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참조).
저는 또한 젊은이들이 피상적이고 덧없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숭고한 목적과 근본적인 선택을 하려는 갈망, 곧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과 아낌없는 투신의 길, 힘들지만 용기가 필요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길에서 여러분은 섬김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의 살아 있는 불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1베드 3,15)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원문: Message of the Holy Father for the 50th World Day of Prayer for Vocations, 21 April 2013, Fourth Sunday of Easter, Vocations as a sign of hope founded in faith, 2012.10.6.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판도 참조>
바티칸에서2012년 10월 6일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감히 전한다. 유다인들의 반대에도 선교는 계속되고 있다. 아무도 성령으로 가득 찬 그들을 막지 못했다. 유다인들은 그 지방 유지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을 선동하여 바오로 일행을 떠나가게 한다. 그들은 박해받는 것을 기뻐하며 그곳을 떠난다(제1독서). 초대 교회에도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목숨을 바친 이들이다. 요한 묵시록은 그들을 흰옷 입은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곁에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제2독서). 착한 목자는 예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바른길을 알려 주신다. 여러 방법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 듣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속에는 목자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연으로 넘기려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처럼 보여도 모두가 ‘필연’입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건과 만남에서 목자의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르심에 충실한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양이 되려면 이제라도 말씀을 알아듣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일의 사건과 만남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읽는 연습입니다.
‘성소’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의 목적은 ‘만남’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맺어 주신 ‘인연’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족만큼 소중한 인연은 없습니다. 모든 만남과 인연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 ‘성소 주일’의 취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하는 것이 될는지요? 인연을 ‘그분의 손길’로 보면 됩니다. 주님께서 맺어 주신 것으로 여기면 거룩한 것으로 바뀝니다. 그러니 ‘모든 인연’을 다시 끌어안아야 합니다. ‘성소 주일’은 이 작업을 하는 날입니다. 한편, 오늘은 성소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꽃과 열매라면, 우리는 뿌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와 선행이 뒤따라야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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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 버리면 얻는 것이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공지영, 『수도원 기행』).
무엇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해서 얻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버리면서 얻는 것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아무리 얻어도 더 큰 목표가 생겨 만족이 있을 수 없는 얻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버리면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므로 만족과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버리면서 하느님에게서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유혹은 버리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공허에 대한 두려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을 주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온전히 의탁하고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한 많은 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히 내리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부르심을 받고도 아직 성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방황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모든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의 은총을 얻도록 기도합시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홍승모 신부-
부활 제4주일에는 3년 주기로 돌아오는 모든 전례력에 나타나듯이, 항상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관련된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이 날에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리는 성소주일을 기념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착한 목자가 되기를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주님 은총 속에 이뤄지는 사제직과 봉헌 생활의 성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모든 성소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은 양들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 핵심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0,11).
착한 목자에 관한 요한복음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런 총체적 전망에서 바라봐야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은 전후 문맥상, 유다인들 사이에 계속돼 온 메시아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인지에 관한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주님을 향한 유다인들 증오와 적개심이 더욱 고조됩니다. 주님과 유다인들은 성전 봉헌축제 때에 성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요한 10,22).
주님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유다인들의 끝없는 불신에 대해 주님 대답은 명확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7-30).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과 달리, 주님을 불신하는 유다인들은 주님 음성을 듣지만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들이시며 메시아란 사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알아듣지 못한다기보다는, 받아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자신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기준 안으로 주님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만을 위해, 같은 편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닫는 폐쇄적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 명예와 영광을 서로 주고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3-44)
당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음성을 진정으로 듣는 사람들은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금년 제47차 성소주일 담화에 이런 권고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특징은 깊은 사랑의 친교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특별히 사제는 친교를 이루는 사람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선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양 떼를 하나로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균열을 치유하며 갈등과 오해를 풀고 죄를 용서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세상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손길이 아기를 보듬어주듯이 주님 손길이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0,29).
목자와 양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목자도 월급을 받고 양들을 치는 그런 전문가가 있을 것이고 비록 양은 몇 마리 안 되지만 어릴 때부터 새끼를 받아서 자식들처럼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우는 그런 목자가 있을 겁니다.
자식처럼 어릴 때부터 키운 목자와 양의 관계는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인지 나를 훔치러 온 도둑인지 분별을 하게 됩니다.
司祭들을 牧者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이 목자이셨듯이 사제들도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목자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사제 생활의 가장 큰 유혹은 직업적인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미사 드리는 기계, 면담하는 전문가, 강론하는 전문가로 변해가는 모습이 가장 소름끼치고 무섭습니다.
사제, 牧者는 결코 직업이 아닙니다.
오늘은 착한 사제, 착한 수도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강론 준비를 하면서 ‘착하다.’ 하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착하다’ 고 하는 그 뜻이 무엇일까? 첫 번째 ‘착실하다’ 두 번째 ‘어질다’ 세 번째는 ‘선하다’
‘착하다’ 고 하는 국어의 사전적인 의미가 뭐라구요? 착실하고, 어질고 선하다.
저는 과연 착한 목자인가?
첫 번째, 착실하냐? 어릴 때부터 제 별명이 김착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통과가 됐고.....
두 번째, 어지냐? 나보다 더 어진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러십시오.^^
세 번째 , 선하냐? 이루 말할 수 없이 착합니다. 어저께 강론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왕자 병에 빠져가지고~~
‘그래, 나는 정말 착실하고 어질고 선한 사제야!’ 저 혼자 그런 생각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자들이 그렇게 봐줘야지....
양들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이익이나 편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 걸고 양들을 보호해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목자가 있어야 됩니다.
감곡 성모님 순례지 성당에는 이곳 성모님의 풀밭에서 살아가는 목자인 저와 교우..... 양들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교우들과 나는 과연 어떤 사이냐?
사제인 저는 양심적으로... .신자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사제인 저를 대하고 살아가는가!
사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목자와 양을 갈라서게 하고 믿음이 깨어지게 만듭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반목하고 피를 흘리고 있는지.....
신자들 얘기 들어보면 “저희들 일 년만 참으면 되요. 저 양반 갈 때 다 됐어요.”
신부님한테 얘기 들어보면 “참 신자들 못됐어요. 저 육 개월만 지나면 딴 데로 갑니다.”
임가밀로 신부님은 이 본당에서만 51년 동안 사목을 하시면서 ‘교우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신자들도 ‘저희들도 신부님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 말보다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야 되는데...
서로가 빨리 찢어지기를 바라고 빨리 가기를 바라고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면...
이게 어찌 목자와 양이 살아가는 주님의 천국이겠는가!
이것은 어느 쪽이 잘못인가!
같은 사제입장에서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철딱서니 없는 사제, 수도자들이 때때로 있습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자식은 분명히 애비를 잘 만나야 됩니다.
그러나 애비가 비록 못되었다 하더라도 자식은 애비한테 돌을 던지면 안 됩니다.
자식은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그 아비를 위해 기도하며 주님께 청해야 됩니다.
서울에 피정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차를 한잔 마시려고 아는 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아파트 문이 열려있기에 밖에서 “계십니까?” 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항상 잘 알던 집이라 들어갔더니 신발이 잔뜩 있습디다.
한쪽이 가로막혀있기 때문에 내가 들어오는 걸 못 봤습니다.
응접실 이쪽에서 저는 몇 번 헛기침을 했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들을 내고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내가 들어오는 것조차도 몰랐습니다.
본의 아니게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가방을 든 채로 삼십 분 동안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아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본당신부를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소리도 안하고 “그치, 그 인간.... 그거 언제 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한 사제도 참 마음이 아팠지만...어쩌다가 본당 신부가 되어서
신자들에게 그 인간, 그치 소리를 들어야만 되는가?
가슴이 답답합디다.
한 삼십분 정도 신나게 지들끼리 떠들고, 씹고, 도마질을 하고, 난리를 치더니 더 할 얘기가 없는지 조용해지기에 그 틈에 “아무도 안계십니까”
그 집주인이 “누구 오셨습니까?” 하고 나와 보니 내가 서있지 않겠습니까?
“어머! 신부님 언제 오셨어요”
“한 삼십분 됐다.”
“그럼 저희들이 하는 말 다 들으셨습니까?”
“그럼 뚫린 귄데 들리지.....”
들었다는 얘기를 떨어지자마자 그 여자들은 얼굴도 못 쳐들고 도망을 치려고
신발을 찾기에 아예 신발을 휙~~흩어버렸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다들 들어가시오!”
지들이 지은 죄가 있는지라... 일곱 여자가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쪼그리고
쫙~~ 앉기에 내가 물었습니다.
“내 오늘 살다 살다 더러운 얘기를 귀로 들었는데 한 가지만 물읍시다.
당신 본당 신부님이 그렇게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여러분 가운데 감실 앞으로 달려 나와서 예수성심께 본당신부님을 봉헌한사람 여기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죠. 있다면 그렇게 앉아서 신부를 난도질 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중에 당신 본당 신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성모님께 묵주기도 하면서 눈물로써 “우리 신부님, 지켜주십시오....”
기도한 사람 있었느냐고 물어봤어요.
있을 리가 없지요.
사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모여 앉아서 험담하지 않습니다.
신부도 인간인데 왜 약점이 없습니까?
어떻게 다 제 입맛에 맞는 사제들하고만 살겠습니까?
사제로서 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제대로 된 신자들은 기도합니다.
우리 신부님 흔들리지 않게 성모님, 지켜 주십시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사제가 요즘 얼굴이 어두워 보입니다.
얼굴에 기쁨이 없어 보입니다..우리 신부님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보입니다..우리 신부님 힘 좀 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지.... 모여 앉아서 사제 하나를 난도질 하지 않습니다.
그 날 그 여자들은 조직의 쓴 맛을 좀 보았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사제에게서 다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욕심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다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피정을 다니면 그곳 신자들이 저한테 뭐라고 그러는 줄 압니까?
“신부님, 신부님 본당 신자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내, 속으로 그럽니다.
‘니도 한 번 와 살아 봐라!’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목을 하셔도 반은 본당신부 반대편입니다.
그 전에 젊은 신부 시절에는 상처를 받았어요
‘내가 지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가 나를 왜 씹고 다녀!’
그러나 씹는 인간은 사제가 바뀌어도 씹는 인간은 끝까지 씹습니다.
인제는 하도 산전수전을 겪다 보니까
누가 씹어도.... 씹는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와도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내 귀에 되돌아 와도
‘그래, 니 한 번 씹어 봐라...니 이빨이 부러지나... 내가 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보자!‘
담대해집니다.
예수님이 사목을 하셔도 반은 반대편입니다.
여기 여러 본당에서 오신 걸로 아는데 여러분 본당신부님에게서
예수님 한 조각만 볼 수 있어도 그 신부님은 성인사제입니다.
예수님을 다 못 보여줍니다.
어느 신부님은 예수님 발바닥 보여주지요.
참 부지런한 신부님 있습니다.
잠시도 가만 안 있고 틈만 나면 가정 방문 다니고, 환자 방문 다니고.. ..
레지오 단원이 병원에 가보면 본당신부님 다녀갔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의 그 발을 보여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예수님의 착한 심성을 보여줍니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활동은 못 하지만 그 신부님 곁에만 가면 착하고 어진 목자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 신부님, 참 착하십니다..
어느 신부님은 예수님의 정의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환전상을 둘러엎으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도둑놈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
그 거대한 조직과 맞서 싸웠듯이 예수님의 정의로운 조각을 보여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예수님의 입을 보여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을 변화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겪었던 신부님들이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사제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나중에 그거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세상 뜰 때 내 한평생 신자생활하면서 내가 알던
그 신부님들을 조각조각 모자이크해 보십시오.
그 때 가서야 예수님이 모습 하나가 만들어질 겁니다.
사제는 사제단으로 존재할 때,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드러나지...
사제 하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본당신부님에게서 약하고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 고.....
그걸 칼로 내치기 시작하면.....사제가 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 술로 해결되겠습니까?
목사님들은 신자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누라나 있지~~
사제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묵주기도 하는 마리아 할머니가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제 힘내라고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들이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잠 못 자고 아들 사제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 엄마가 계시겠지!
이런 생각이 사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힘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위해 기도해주는 신자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사제는 사제복을 벗어버릴 수밖에 싶습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은 사제들입니다.
신자가 수백 명 냉담을 해도 교회가 허물어지지 않지만
사제 하나가 환속하면 교구가 다 뒤집어 집니다.
환속한 본당에서는 몇십년 동안 성소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후유증이 그토록 길게 갑니다.
사제 하나를 거꾸러뜨려야만, 그 사제를 바라보면서
주님께로 나가는 신자들이 같이 망가지기 때문에 사탄은 사제들을 통해서 신부를 버립니다.
여러분들, 명심하십시오.
사제는 개인수도가 아니라 공동우물입니다.
어느 한 사람만 입대고 마시는 개인수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두레박으로 물 퍼서 마시는 공동우물이 사제입니다.
사제에게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사제는 멀리서 볼 때 아름답습니다.
피정 다니다 보면 ‘어느 신부님은 어느 신자들하고만 어울린다!’
거기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기질투 때문에 그 신부를 씹습니다.
그 신부님은 맨날 술만 먹고 고스톱만 치신다.
그런 얘기가 귀에 들립니다.
사제도 분별력이 떨어질 때가 있을 겁니다.
사제라고 24시간 깨어 있을 수만 없습니다.
사제생활 하면서 슬럼프도 있을 수 있고, 권태기가 올 때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분별력이 없을 때 신자들이 지켜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신자들은 신양생활 하다가 슬럼프에 빠지면서
왜 사제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제는 멀리서 볼 때 아름답고 신비스럽습니다.
사제가 편안해 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차 한 잔 마시러 갈 때 아무 소리도 안 날거라고 믿고 갑니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보면.......사제는 개인 수도가 아닙니다.
사제는 공동우물입니다.
내 신부님이 아니라 우리 신부님입니다.
이 환난의 시대에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점점 더 어려워지는지....
지금 신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사제생활하기가 이렇게 힘이 든데....저 어린 사람들이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이 험난한 시대에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려운 길, 내 자식 어찌 보내노!’
하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사제는 성령이 지켜 주시고, 사제는 성모님이 지켜주십니다.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 자신이 흔들리다가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사제는 일어섭니다.
오늘은 사제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은퇴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투병생활을 하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거룩한 사제, 거룩한 수도자가 필요한 이 시대에 착한 목자주일을 맞으면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혹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신부님에게 상처를 받고 그 신부님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면... 오늘 이 미사를 드리면서 그 사제를 용서합시다.
신부님께 말로써 지은 죄, 험담했던 죄, 사제를 함부로 판단했던 죄,...
주님 앞에 겸손되이 뉘우치면서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을 매괴성모님께 봉헌합시다.
매괴성모님,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누군가 널 위하여 기도하네
1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우리의 마음이 지처 있을 때에 갈보리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주님은 우리 외로움을 아시고 우리맘에 기쁨주시니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