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하지만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 루카 12,13-21
부자 되십시오
반영억신부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욕심은 만족시켜 주면 시켜줄수록 더해집니다. 더 많이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참으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푸는 마음은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만족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또 그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애착하고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그들은 세상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들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꼭 들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26장 12절-13절에 보면 “이사악은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수확을 백배나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수단이 됩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언3,9) 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는 큰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재산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13장 6-7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천막이 넘쳐 났지만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시편52,7-9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천막에서 잡아채고 끌어내시어 생명의 땅에서 너를 없애 버리시리라. 의인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 보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을 믿으며 악행으로 제가 강하다고 여기던 사람!”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9-10)
집회서에서는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집회31,5-6)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복권사상 최고액인 3억1천 490만 달러(약3천억원)가 걸린 복권에 당첨되었던 미국인 사업가 잭 휘태커(60)가 약 5년 만에 완전 빈 털털이로 전락했다고 언론이 보도하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행운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그는 부도수표 발행으로 기소 되었고, 도박에 손을 대기시작 당첨금을 탕진하였으며 음주운전혐의, 술집지배인 폭행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차량과 사업체가 강도질을 당하는 등 그야말로 인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실 그칠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 법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굴러 들어온 일확천금이 그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재물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지게 됩니다. 더더욱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루카12,15).
그러므로 세상의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그러므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게 하시고(마태6,19-20)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결코 살지 않게 하소서.” 아멘.
여러분, 부자 되십시오! 그러나 세상의 부자이기에 앞서 하느님 앞에서 큰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재물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 재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
여러분! 미국의 갑부였던 록펠러 아시지요? 어느날 타임지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십니까?”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기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그때 록펠러는 “조금만 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많이도 아닌 ‘조금만 더!’ 돈을 벌어야겠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 신자로부터 매일 10불씩, 한국 돈으로 1만원씩 기부를 받았습니다. 천일을 약속하시고 좋은 일에 쓰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1만불을 약속하시고 채 끝나기 전에 천국으로 가셨지만 장례식날에 나머지를 다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대신 약속을 지켰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하루의 감사한 마음을 재물에 담아 봉헌하셨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매일 사랑을 담아 봉헌하신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귀하게 보신 주님이십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반드시 넘치는 은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귀한 마음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마 그분은 형편이 나아지면 더 크게 하길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느님 앞에 부자가 되는 구체적 행동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벌어놓고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10년 통계자료는 9억 2,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지금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하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매월 첫 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해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애덕을 실천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한 어린 아이의 목에 동전이 걸렸습니다.
아이의 아빠가 깜짝 놀라 병원으로 데려 가려 하니까 그 부인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신부님을 부르면 돼!”“우리 신부님은 어디에서든 돈을 잘 빼내잖아요!”
아이의 아빠가 깜짝 놀라 병원으로 데려 가려 하니까 그 부인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신부님을 부르면 돼!”“우리 신부님은 어디에서든 돈을 잘 빼내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돈을 빼내려 하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남의 돈을 빼내려 하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 3가지는? ‘황금, 소금, 지금’이랍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 ‘현금, 지금, 입금’으로 변했답니다.
2013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Be on your guard
and avoid every kind of greed, for even though
you have many possessions,
it is not that which gives you life."
(Lk.12,15)
제1독서 코헬렛 1,2; 2,21-23 제2독서 콜로 3,1-5.9-11 복음 루카 12,13-21
조명언신부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나이가 젊은 사람의 차이는 시간을 느끼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1년 차이만 나도 엄청난 사이가 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똑같은 일 년인데, 네 살짜리 아이에게는 자기 인생의 4분의 1이지만 여든 살 어른에게는 자기 인생의 8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누구나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리다고 영원히 어릴 수가 없으며, 또한 나이를 거꾸로 먹어 젊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늙은이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흉볼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실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만을 생각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심입니다. 이 시선 때문에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시선 때문에 더욱 더 내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탐욕이라는 세상의 기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려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는 것처럼,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누릴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이 하느님의 기준보다 늘 앞에 놓이는 것은 왜 일까요?
몇 해 전에 아주 힘든 일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도저히 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요.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아래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묵상을 할 수 있었지요.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 아래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그 기준만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인디언 계산법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되네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이 아닌, 정말로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기준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요?
백인들이 인디언 땅을 차지하고 미국식 교육을 주입할 때였다. 오지브와족 출신 아이가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들의 교육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교실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어느 날, 덧셈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고깔모자를 쓴 채 창문 너머로 도토리를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를 네 개 가졌는데, 친구에게 한 개를 주면 몇 개 남지?”
늘 묵묵부답이던 아이는 처음으로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줘야 해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갖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