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루카 10,38-42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묵상◎
한 청년이 매일같이 빵집을 들러 식빵을 사 갔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그는 늘 식빵만 찾았습니다. 빵집 여주인은 영양가가 부족한 빵만 사 먹는 그 청년을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청년도 모르게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청년은 빵집을 찾아와 불같이 화내다가 마침내는 좌절한 표정으로 맥없이 주저앉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도시 계획의 설계 공모에 제출하려고 오랫동안 설계도 작업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도의 지우개로 사용하려고 지금까지 식빵을 사 갔는데, 하필 마무리 작업을 하던 그날 저녁 그 버터 빵 때문에 설계도를 모두 망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는 전혀 모르는 채 그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 준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에 필요한 것은 헤아림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랑은 상대방을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마르타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드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데,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듣는 둥 마는 둥 시중만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오히려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강론/ -마산교구 유 영봉 몬시뇰 신부- ★
묵상 길잡이 :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오로지 기도생활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반대로 오로지 활동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 같다. 기도 없는 활동 그것은 자기과시로 흐르기 마련이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이다.
1. 귀나 좀 빌립시다.
신자 가정을 방문하여 함께 기도를 하고 나서는, 대강의 집안 이야기를 듣는다. “큰아들은 지금 군에 가있고 둘째 아들은 객지에서 대학 다니고, 막내는 재수하고 있습니다.” 말씨가 이곳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향은 어디며, 집안은 언제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 등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차(茶)나 음식준비에 온통 정신 이 팔려 물어보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거나 번번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제발 귀나 좀 빌려주었으면 하는 때가 많은 것이다.
오늘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대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전념하였다.
혼자 음식준비에 정신없이 동동거리던 언니 마르타는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달라고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가 “필요한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반갑고,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야 마르타나 마리아나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였던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 ‘바쁘다, 바빠 병’을 치료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바로 ‘알차게 사는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요즘 바빠서 죽을 지경이다.”라는 푸념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 사람치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며 음미(吟味)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않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라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 하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을 하게 되니 늘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이다.
바쁘게 해치우는 일은 언제나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불량품이 많게 마련이다.
국제 기능 올림픽에서 늘 제패하면서도 불량품을 많이 내는 기업 풍토는 바로 바쁘게 대충 해치우는 행동관습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으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른 시일 안에 완공을 했다. 그러나 그 고속도로를 보수하는 데 처음 시공비의 몇 배가 더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3.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사는 길은 없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단순히 기도와 활동의 양자택일로 대비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고자 침묵중에 묵상하는 시간 없이는 그 말씀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가끔 신자들이 와서“신부님, 다시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명령만 하고, 얼마나 기분 나쁘게 무시 하는지 모릅니다.”하고 말하며 함께 일한 간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
함께 본당활동을 하면서 그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는 신심단체 간부들은 일을 하는 과정 에서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이 없이 지내는 ‘잘난 사람들’일 때가 많다.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은총이 스며든다. 성령의 은총은 그 마음을 부서지고 낮춰진 마음이 되게 해주신다. 은총으로 부서지고 낮춰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명령하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데 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그 마음에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세속적으로 스스로‘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봉사를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 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군림하는 자세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2013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선택 속의 우리
- 이요한 신부-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자선과 봉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일치 없이 이루어지는 이런 행위는 자칫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관용구이지요. 교회 일이나 각종 봉사나 자선에 열심히 부지런히 나서지만 그것이 오지랖이 넓은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행한 각종 자선과 봉사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투정에 대해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선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한 가지를 고르는 기준은 하느님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가지길 바라십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따라서 우리는 순명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완전한 자유로 이끌어 주는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선택 속에서 올바른 선택,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고기 뷔페집에서
양승국(ystefano) 
언젠가 식욕이 왕성한 아이들, 젊은 수사님들과 고기뷔페 집에 간적이 있습니다. 종업원들이 차려놓는 즉시 그야말로 ‘싹쓸이’였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갖다놓은 즉시 초토화니 종업원들은 물론 사장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 졌습니다.
급기야 사장님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여기 계산하실 분 누구냐’고 저를 찾았습니다. 저는 정중히 사과를 드렸고 일인당 얼마씩 더 추가로 계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고을 저 고을 전도여행 다니느라 허기진 장정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간 얼마나 쫄쫄 굶었던지 다들 차려놓기가 무섭게 싹쓸이였습니다. 주방 총 책임자격인 언니 마르타는 그야말로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를 한번 보십시오. 언니는 걸신들린 제자들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마리아는 손 하나 꼼짝하지 않고 화사한 얼굴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 입장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요. 생각 같아서는 “마리아, 너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여? 나 바빠 죽겠는거 안보여?” 하며 당장 주방으로 끌고 갔을 텐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예수님께 볼 맨 목소리로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때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너무나 당연히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마리아. 이제 좀 일어나서 언니 좀 도와주지. 사람이 눈치가 좀 있어야지. 빨리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실시!”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제 삶을 돌아볼 때 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일에만 빠져 있을 때, 일중독주의에 파묻혀있을 때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면서 일을 할 때와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 때,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활동은 더 의미와 기치를 지니고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둘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도직 활동은 훨씬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일에만 목숨걸때 우리는 쉽게 지칩니다. 불평불만은 쌓여만 갑니다. 마르타처럼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일만을 위해서 일을 할 때, 일 중독자들의 끝은 결국 허탈함이며 공허함이며 허무입니다. 플러스알파를 찾아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 발치에 앉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