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28)

2015. 2. 1. 오전 8: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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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마르코 1,21-28)

 

연중 제4주일 마르코 1,21-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의 적인 악령이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까지 버젓이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그가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않았을까? 겉으로는 멀쩡한 이웃 사람이었으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악령이 이웃의 몸을 입고 들어온 것이다. 영혼과 정신이 악령에 사로잡힌 채 살아오던 사람이다. 회당에 들어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 ‘왜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왜 간섭하느냐고? 에덴 동산을 파괴하고 하느님 나라를 더럽히는 마귀들과 어찌 공존할까? 나는 사람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까지, 마침내는 온 세상을 정화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이다. 아버지의 집과 사람들의 영혼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악귀들을 쫓아내 정화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도하는 성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는 우리 본당에도 악령 들린 자들이 버젓이 들어와 있을 수 있다. 심령으로 살펴보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혼과 정신이 헛된 이념의 잡귀에 사로잡힌 줄도 모르고 신자 행세를 하고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냐? 사제의 강론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한 자, ‘강론대로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가진 자가 여기 앉아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악령이 들어와 혼란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성수를 뿌려 당장 악귀부터 쫓아내는 것이 순서다. “조용히 해라! 당장 나가거라!”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악의 세력들이 맴돌고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만 정의로운 것처럼 정의를 외칩니다.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랑을 외치며 교회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자신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만을 침소봉대합니다.

‘교황님이 다녀가셨는데 왜 한국 교회는 바뀌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 받고 죽음을 겪으셨는데도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바뀌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 바꾸라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려면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해야만 사랑의 교회가 됩니다. 자신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만 요구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자세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악령이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어느 사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자처하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어느 수녀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영성의 대가이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끈질기게 요청하는 바람에 요한 신부님은 수녀님의 체험을 글로 적어 보내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겸손하지 않느냐? 이것은 영의 체험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거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비를 체험한 후 저술 작업을 중단하였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신비에 비하면 자신이 언급한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진술은 ‘지푸라기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신비체험의 영적 식별의 가장 기초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이 먼저 합시다. 그리고 겸손 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악령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대교구 조규만 주교>

 

 

삽시간에 퍼진 예수의 소문                            

 -강길웅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전도활동의 무대를 갈릴래아 지방 으로 정하시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가파르나움입니다. 세례자 요한 이 주로 남부에서 그의 사명을 수행했다면 예수님은 북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활동의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 며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가파르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대중들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대단히 권위가 있고 그리고 이해가 쉽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으며 특히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악령이 무서워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 람들이 탄복을 했고 그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 해 봐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학자들의 권위가 쇠퇴하게 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은혜와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두려움과 그리고 속박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목소리만 높였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 축소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에서 외면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생전 느껴보 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흘렀고 복잡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하느님의 율법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체험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정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론이 나 전통에 묶여져 있지도 않았으며 왜곡된 내용을 쓸데없이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막연하고 애매한 것은 직접 예화를 들어 설명해 주셨으며 말씀의 참뜻이 무엇이며 거기에 어떤 힘과 사랑이 있는지 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었으며 또 한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의 교수법이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행의 일치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악령 보고 '나가라.' 하시자 악령 이 혼쭐이 나서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언행의 일치'입니다. 아무리 강론을 잘하고 아무리 사목을 잘해도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는 권위를 잃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직자라는 자들이 거짓말이나 하고 돈이나 밝히며 선하게 살지 않는다면 성직자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장난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어떤 본당이 있는데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열심과 기도로써 받은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2백만 불짜리 집 을 거저 얻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가 우리가 한 푼도 안 주고 거저 성전을 얻었으니 우리가 모은 돈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일 이 일어났습니다. 의대 교수였던 회장과 신문사 사장이었던 어떤 형제가 들고일어나서 신부를 비난하고 신자들을 선동해서 악착같이 반대해서 본당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이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도 꼭 실천해야 할 인간 의 과제입니다. 더구나 그가 신앙인이고 의술을 펴는 의사요 또한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그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남들이 반대해도 그 들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불쌍한 이웃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사랑을 펴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반대를 하게 되니 과연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사가 아니고 언론인이 아니라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는 신앙을 떠나서도 한 인간으로서 끝장이 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쌍한 이웃 들이 많습니다. 아니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삽시간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은 없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예수님의 소식을 그렇게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이웃에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사회를 밝힐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눕시다. 거기에 사랑의 권위가 있습니다.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양 승국 신부-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새’란 노래를 잘 알고 계시지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사 몇 구절이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제 안을 들여다보면 어찌 그리도 많은 또 다른 내 모습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수만 가지의 모습의 제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때로 저도 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선량하지만 때로는 악랄합니다. 때로 순수하고 감성적이지만 때로 그렇게 교활할 수 가 없습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로 살았습니다만, 때로는 보기만 해도 흉한 악령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라도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았는가 하면, 지옥 불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죄 중에도 살았습니다. 그 수만 가지 모습 때문에 방황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온 제 인생인 듯합니다. 그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참으로 딱한 한 인간을 만나십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었습니다. 보통 악령이 아니라 지독한 악령이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스스로를 한번 통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일이 다 허사였습니다.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악령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맙니다. 악령의 활동이 잠시 중지될 때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요.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혀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느꼈던 스트레스도 컸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옆에서 느끼는 고통도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무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도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도움을 주던 친구들도 떠나갔습니다. 이제 혼자가 되어 정처 없이 전국산천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이 오늘 주님을 만납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존재로 인해 고통당하는 영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영혼, 하루 온종일 악령에 시달리는 가련한 영혼 앞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춥니다.

우리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 분명히 악에로 기우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인도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세력이야말로 이 시대 악령입니다. 성령에 반대되는 악령, 불결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그 악령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우리를 괴롭힐까요?

악령은 타락한 하느님의 영입니다. 겉은 그럴 듯합니다. 머릿속에는 천사의 지식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식별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입니다. 인간의 시선을 흐리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을 잃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금하고 계시는 행위를 하도록 자극합니다.

이런 악령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령의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방어의 수단으로서 나온 말입니다. 비록 타락한 영이지만, 하느님을 거스른 영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영이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악령이 하느님 앞에 서 있자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의 찬란한 성덕 앞에 격분한 악령은 아직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될 예수님의 신원을 재빨리 폭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기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령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악의 세력은 순식간에 우리 인생을 점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이 하느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흘러넘친다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성령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악령의 지배를 받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2월 첫날입니다.
1년중 가장 짧은 달이니 더 알차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성장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는 데도 불구하고
성장이 참으로 더디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아마도 쓰잘데 없는 것으로 우리 맘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보다
먼저 내 속에 있는 나쁜 것들을 비워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게 나의 힘만으론 쉽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 주십사고...
내 안에 있는 사악한 감정과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이런저런 세상사에 대한 근심걱정, 이런 것들이 내 속을 점령하고 있는 한
나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으니까요.

오늘 주님께 이런 악령들을 내쫓아 주십사 청합시다.
그분은 기꺼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실 겁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리고나서 맑고 깨끗한 좋은 영으로 조금씩 채워갑시다.

  

오상선신부

참된 권위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처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과 봉사, 희생을 통해서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 누릅니다. 나 누군데... 청와대에 있는데..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들은 외면하기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가, 병원에는 의사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하고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3이하)
그런데 왜 더러운 영이 들리게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첫 반응은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거부하는 소리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생명이 말라 버린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자기 생활 속에 하느님의 존재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생활에서는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 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두번째 반응, 증세는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멸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를 좋아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순명하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유광수신부님의 ‘다가오는 예수’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처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과 봉사, 희생을 통해서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 누릅니다. 나 누군데... 청와대에 있는데..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서 권위는 사라지고 권력의 횡포만 살아있어서 걱정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들은 외면하기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세금정책이나, 연금개혁등을 하는데 있어서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요? 누가 뽑았습니까?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가, 병원에는 의사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하고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3이하).
그런데 왜 더러운 영이 들리게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첫 반응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거부하는 소리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생명이 말라 버린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자기 생활 속에 하느님의 존재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사람,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생활에서는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 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두 번째 반응, 증세는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멸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를 좋아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순명하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광수신부님의 ‘다가오는 예수’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2월의 첫날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선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겸손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물속에 비친 모습이 나의 모습이듯이 나의 삶과 나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여 질 것입니다. ‘난향 천리, 덕향 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과 겸손함이 향기 그윽한 난보다 더 멀리 간다는 뜻입니다.

2월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사제, 부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서품을 받기 전에 후보자들은 교구장님과 교회 앞에서 순명서약, 독신서약,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일에만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명해야 합니다. 사제가 혼자 사는 것은 이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제가 선포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서품을 받으시는 분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성직자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정을 해야 합니다.

올해에도 서품 대상 부제님들이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가장 강조하는 것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 부분이 피정을 하는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2월의 첫 날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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