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 마르코 1,29-39)

2015. 2. 8. 오전 9:47:14

글자

 연중 제5주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코 1,29-39)

 

오늘의 묵상

치유를 베푸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일정은 휴식이 없으실 정도로 너무 빠듯하다. 내일의 일정도 여전한데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고, 그래서 기도는 늘 밤 시간에 하셨어야 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스승님의 열정적 삶이 곧 하느님의 일임을 믿게 된다. 나 또한 제자다움의 열정으로 살고자 실천할 열 가지를 한참 전에 결심했다.
1.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단 한 번뿐인 미사처럼 봉헌하자.
2. 모든 일에서 하느님과 동업하자. 매사에 성공할 것이다.
3. 예수님께서 주신 구마와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자. 스승의 유업이고 의무다.
4. 복음서와 책을 늘 가까이하며, 의심받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도 질문하자.
5. 매일 정한 시간만큼의 육체노동을 하자. 영감과 몸의 창조성이 살아날 것이다.
6. 심사숙고하되 내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믿지는 말자.
7. 항상 경어와 친절이 습관화되게 하며, 선물은 감사히 받되 반드시 공유하자.
8. 짜증스러울 때는 말과 표정을 유념하고, 화났을 때는 결정하지 말자.
9. 물품은 명품이나 상표를 무시하고 필요성과 대체성을 거듭 생각해 보고 구입하자.
10. 건강을 위해 푹신한 침대, 텔레비전, 전자레인지를 버리고, 튀김 요리를 먹지 말자.
지금까지 잘 실행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내가 결심한 것이지만 빈약하다.

 

 

 

인기에 영합하지마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 소신 있는 사람, 그러나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을 보듬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저 소신을 편다고 백성의 소리는 귓전으로 흘려 버리고 똥 고집을 편다면 모두가 피곤합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하나 봅니다. 요즘 정부와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자기가 최고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국민이 지칩니다. 우리 신부들도 그렇게 할 때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나 책임자가 되면 그야말로 왕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신자들은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신자들이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그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이 외딴 곳으로 가서 한참 기도하고 계실 때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7)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본당 신부가 마음 먹고 기도 좀 하려는 데 사목위원이 와서 신부님 오늘 생신이신데 자리를 좀 마련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9). 예수님께서는 세상일은 제쳐두고 하느님의 일을 챙기십니다.

그런데 저는 생일은 무슨 생일하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그것을 즐깁니다. 기도는 뒤로하고 소주 한잔 걸치는 것을 우선 선택합니다. 그러고는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한양 어깨에 힘을 줍니다. 신자들이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한다든지 술 한잔 하지고 하면 인정받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제자들이 한 말에는 한편으로 유명해지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기가 좋으니 인기관리 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오히려 야망을 부추기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즉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써 당신을 챙기지 않고 당신 백성을 보듬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늘 간직하셨습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따라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우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 행함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듯이 우리도 이런 저런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한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일어서서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늘 일치해야 가능함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어가신 기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도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마르6,46),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마르14,32-39).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을 때에도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루가6,12).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16. 19.22). 그야말로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다른 고을을 찾으셨듯이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 약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앞 길을 예수님의 길로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걸으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꾸 멈칫거리고 있습니다. 하오니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들의 앞길을 비추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사랑합니다 

     언젠가 드렸던 말씀입니다.   스승님이 평생 아끼던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근 채 그 책을 읽곤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제일 먼저 그 책을 꺼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엔 이렇게 단 한 줄만 씌어 있었습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하라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껍데기인지 알맹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알맹이를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도' 고쳐 주셨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그것은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표징이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셋 다 맞는 말인데,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뜻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은 맞지만, 그러나 병을 고쳐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은 복음 선포의 한 부분이고,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그 일 자체가 복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얻게 된 그 '해방'은 하느님 나라의 표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묵시 22,2)."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은 질병도, 병고도 없는 하느님 나라의 해방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만일에 사람들 쪽에서 병을 고쳐 주시는 '일만' 바라보고, 그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병자 입장에서, 병이 나았다는 것만 생각하고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런 경우에 예수님은 병을 잘 고쳐 주는 의사만 될 뿐입니다.

또 병을 더 잘 고치는 다른 의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그 의사에게로 우르르 몰려 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기적을 행하셔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빵만 보았습니다.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그들이 생각한 임금은 메시아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배불리 먹을 빵을 잘 주는 세속의 임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뒤에 외딴곳에서 기도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일도(마르 1,36-37) 메시아가 아니라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찾아다닌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만 찾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6-27).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몸의 건강만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생명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일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도 아니고, 당신을 믿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프니까 병을 고쳐 주셨고, 배고프니까 빵을 주셨는데,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일이고, 진짜로 주신 것은 '치유, 해방, 평화, 기쁨'입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쪽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런 것만 원할 때가 많습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나라에 있다는 '만병통치약이 되는 생명나무의 나뭇잎만' 찾는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 나뭇잎의 치유력은 그 나무 자신의 힘일까? 

만일에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 나뭇잎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있다는 생명나무의 치유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 나무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나무는 생명나무가 아닙니다.

또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예를 들면 지옥에 그 나무를 심는다면, 그런 경우에도 그 나무는 더 이상 생명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호수가 고요해진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고, 또 호수만 바라보지 않았고,그렇게 만드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들을 비롯해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인가?",

또는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께 청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송영진 모세 신부

 

 

 

 

 

 

나를 따라 오너라 --------------서광석신부-

한 수도자가 있었다. 깊은 산 속 바위가 그의 집이었다. 비바람과 굶주림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명상의 기쁨 속에 살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수도에 필요한 책 한 권을 줬다. 다음 날 아침 책을 보니 쥐가 표지를 갉아 먹었다. 쥐를 쫓고자 고양이를 구했고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려고 소를 마련했다. 그것들을 혼자 돌보기 힘들어 여인을 맞아 들였고 그를 위해 집을 지었다.

 귀여운 자녀도 생겼다. 더 이상 명상에 전념할 수 없었다. 책 한 권의 소유로 수도자의 삶은 달라졌다.

우주생성 수백억 년에 비하면 우리가 머물다 가는 인생 80여 년이란 순간처럼 짧은 세월이다. 그마저 대부분 슬픔과 고통으로 쌓여 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겪는 고통은 불완전한 인간 속성상 자초하거나 가족, 사회공동체의 생활을 인연으로 숙명처럼 씌워지는 짐이다. 또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화의 수도자처럼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것에서 이탈되는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 치열한 경쟁구도 안에서 겪어야 할 허무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부와 지식과 세상을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똑똑한 사람을 보면 불평불만을 품고 불행을 느껴 평화롭지 못하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진 인간이요 영적 육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고통스러운 존재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희생제물인 어린양이 되셨다. 봉헌된 희생양의 삶을 사시면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몸소 겪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에게로 결집시키셨다.

욥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본 적이 없는 의인이다.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 7,1-7)이라며 고통을 토로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런 욥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

욥의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를 상징하는 의인의 고통으로서 대속의 의미를 뜻한다. 새로운 생명을 낳는 희생제물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이고 구원의 신비로 연결된다. 죄인의 희생과 고통은 의로우신 하느님 구원계획에 대속물이 될 수 없다. 의인의 고통만이 원죄의 멍에에서 인류를 구할 봉헌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상생활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아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다. 즉 스스로 고통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시므로 그 고통을 껴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희생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통과 기쁨, 패배와 승리, 죽음과 삶이 표리관계에 있다는 완벽한 상징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함께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기에 참고 견디어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우리 존재자체를 뒤 흔드는 이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좌절, 우울증과 자살 등에 이르는 심각한 인격적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하느님께 드리고 그 결과까지도 완전히 의탁해야 할 봉헌물이다.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인격을 드리는 것이다. 새 생명을 낳음으로 물질적 풍요를 돕는 경제적 봉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에 고통의 진정한 의미가 구원의 신비 안에 숨겨져 있다. 고통의 봉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더 큰 기쁨을 잉태한 거룩한 대속물이며 사랑이다.

우리는 살면서 남에게 준 고통에 대해서는 회개와 보속으로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 주어진 고통을 기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며 서로가 위로하고 도움으로써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눈물이 마르고 설사 뼈가 나와 보일 만큼 운다 해도 결국 세상은 무정한 것 그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며 이웃의 외면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영적, 내적 치유를 해주셨다. 우리도 이웃의 고통과 함께해야 하며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1,37)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루가 25시간이라도 모자라는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있지요?
여러분도 그런 날이 가끔은 있었지요?
오늘도 그럴 분이 있을 테지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자마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네요.
하루종일 밀려드는 환자들을 고쳐주고
식사할 겨를도 없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잠시 쉬는데
새벽같이 제자들이 찾아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일러줍니다.
떼돈을 버는 일이라면 힘들어도 또 나가야겠지만
이건 순전히 봉사하는 일이라 때론 짜증이 날만도 하죠.

그러나 예수님은
짜증 내시지 않고 "그래 가자. 다른 고을에도 가야지." 하시며
길을 재촉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는
떼돈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일입니다.
또 아무리 바빠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시간은

가장 감미로운 휴식이요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오늘 주일에
한주간 동안의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미사와 기도로
재충전하시고
내일부터 또 부지런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진력을 기울입시다.
귀찮아 하지말고 짜증부리지 말고... 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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