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마태 2장 1-12절)

2014. 1. 5. 오전 6:35:52

글자

 

 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 2장 1-12절)

 

주님 공현 대축일과 함께 우리는 성탄 축제를 장엄하게 마무리해 갑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부터 우리는 마음껏 강생의 신비를 경탄하고 음미하며 보냈습니다. 목가적인 음악, 제대 주위의 화려한 장식, 연말연시의 흥겹고 들뜬 분위기, 기쁘고 편안히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우리는 성탄 이야기를 자주 아름다운 동화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듯이, 아기 예수님께서 오신 삶의 자리는 가난과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운 차가운 곳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강생의 신비는 고난 속에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이와 당신께서 맺으신 깊은 일치 속에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 영광의 빛은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길에 함께하려는 사람들에게 비치고 또 그들을 통하여 증언될 것입니다.
나치 독일의 유다인 박해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불세출의 여성 철학자이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한 가르멜회 에디트 슈타인 수녀, 곧 십자가의 성녀 베네딕타 수녀는 죽음의 예감 속에서 주님 공현의 묵상을 남겼습니다. 성녀가 남긴 묵상 구절은, 달콤한 위안으로서의 ‘크리스마스’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성탄 축제가 저 깊은 곳에서 어떤 구원의 신비와 만나고 있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그 길은 당연히 골고타로 인도되고, 그리하여 구유로부터 십자가로 인도됩니다. …… 베들레헴의 별은 죄의 어두운 밤을 비추고 있습니다. 구유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그 빛줄기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늘어뜨립니다. 불 꺼진 성금요일의 어둠 속이지만 부활절 아침에는 은총의 태양이 더욱 눈부시게 떠오를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라는 말은 공적으로 드러난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구세주가 아니라, 이민족 모든 민족들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국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품질이 떨어졌고, 우리나라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국산이라는 말은 믿을 만 하다는 말과 비슷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제품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직하게 일을 하였고, 성실하게 물건을 만들었고, 좋은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목동들, 동방박사들만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첫 번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공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목동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의 경배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 자신의 능력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은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행동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있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갇힌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셨고, 기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원하는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걷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업적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기도 하고, 우리를 다시금 어둠의 세계에 머물게 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병든 이들을 위해서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은총의 선물인 세례를 받았으니, 우리는 그 선물을 우리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은 나누면 작아지지만 은총의 선물인 세례는 우리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우리의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성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와 동방박사들을 보았습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헤로데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 명예와 욕망을 채우려는 헤로데의 방법으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가 알려주는 길을 가지 않았고 자신들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이렇게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떠나자


주의 공현 대축일'을 전에는 '삼왕내조첨례'라고 했습니다. 즉 3명의 왕이 아침에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뵈러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왕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박사라 고 부르며 또한 그들이 주님을 찾아가 경배 드렸다는 사실보다는 아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사실 전 인류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꼭 유대인만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을 통해서 오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먼저 유다의 목동들이 찾아가 경배 드렸으며 이어서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목동은 당시에 천한 수준이었으며 박사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위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합니다.

1독서에 보면 폐허된 예루살렘이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얻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노래가 나옵니다. 그때는 강대국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져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고 예루살렘을 일으키시어 만백성들이 보물들과 선물들을 가져오는 위대한 중심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수백 년 뒤에 그대로 적중이 되어 하느님 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태어나시고 이방인의 박사들이 전 인류를 대표해서 보물을 들고 그분을 찾아가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때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었으며 또한 수백 년 동안의 치욕적인 사건들을 다 보상받았습니다. 드디어 믿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직접 머무르시고 가르치셨던 선택받은 도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잘못된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고 사랑받게 되며, 또한 오랫동안 고통 받아 온 모든 아픔들을 다 보상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사들의 그 용기와 희망과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복음에 보면 도대체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뵙고 경배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다만 황금과 몰 약과 유황이라는 선물을 통해 세 명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런 귀한 물건들이 주로 궁궐에서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에 왕들이 온 것이 아니냐 하고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라기보다는 박사나 현인, 혹은 학자라는 말 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전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할 때 그들이 여행한 거리는 우리나라 남북의 삼천리 보다 더 먼 거리였으며 당시의 사정으론 굉장히 힘들고 위험 한 도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확신할 수도 없는 어떤 만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생애를 투신합니다. 그리 고 가장 좋은 보물을 품에 간직하고 그분을 뵙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믿음과 인내 때문에 드디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소원 성취를 한 것입니다.

믿음이 사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나그네 길입니다. 아니, 주님을 만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긴 장마 때문에 태양을 못 보는 경우 도 있으며 찬바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아픔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참고 걷게 되면 결국은 우리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우리의 것을 다 드리려는 열린 마음을 가질 때 그 감격과 기쁨이 큰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박사들의 행위를 보면 답답하고 어리석습니다. 도대체 바쁜 사람들이 고생스런 먼 길을 걸어서 어떤 아기를 잠깐 보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봤다면 세상을 다 얻어 가지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차롑니다.

우리도 '신앙'이라는 먼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오히려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바치려는 갸륵한 마음으로 올 한 해를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이 날을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박사들처럼 용기 있게 걸어가는 지혜를 배웁시다. 아무리 고달파도 희망을 가지고 참고 견뎌내는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도 결국 채워질 것입니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말씀자료 : -광주대교구 강 길웅 신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 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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