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거룩한 변모사건 .(마르 9,2-10)

2015. 2. 28. 오후 8:27:34

글자

  

<사순 제2주일>(2015. 3. 1.)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 9,2-10)

                   서울교구주보2000호 발행기념일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잠시 눈을 들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그분의 식탁으로 나아갑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경외하여 외아들까지 바침으로써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창세 22,1-2.9ㄱ.10-13.15-18).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위하여 친아드님마저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 그 사랑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기에 믿는 이들은 역경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간다(로마서 8,31ㄴ-34).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때까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믿음은, 수난의 순간에도 제자들의 믿음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2-10).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고유 시기(사순, 부활, 대림, 성탄 시기)에는 되도록 그날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이어 주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본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오늘의 묵상’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빛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사악을 바치러 산에 오르던 아브라함은 앞을 내다볼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약속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게 되면 후손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칩니다. 인간의 계산과 논리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온갖 환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세상의 고발과 단죄는 힘을 잃고 맙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의 처지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영광스러운 변모 다음에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해 줄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보았던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모든 것이 실현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는 그날까지 제자들의 눈앞에서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제자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수난을 견뎌 내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예수님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해도 그분은 당신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아브라함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산에서 내려와 오늘의 기억을 간직해야 했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시다.   
  

 8월 6일 [이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예고 때에는 베드로 사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고(마르 8,32),

두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두려워하기만 했고(마르 9,32),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못 들은 척 한 것인지...?)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수난도 죽음도 부활도 모두 이해하지 못했고,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미리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당신의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고, 부활 후의 모습이기도 하고, 승천 후의 모습이기도 한데, 어떻든 그 일은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라는 베드로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하니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단순히 예수님의 '변모'만 목격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와 그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행복과 평화를 영원히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하느님께서 직접 대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또 제자들의 체험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대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행복과 평화를 누리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는 점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가리키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신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35)."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려고 하신 일은실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들에게 대단히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알고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마지막 목적지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입니다. 이것은 사순시기가 끝나면 부활절이 오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확신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십자가를 만나면 지고 가면 되고, 가시밭길을 만나면 그대로 밟고 지나가면 됩니다. 십자가와 가시밭길이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것은, 고통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얻을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 라는 목적지로 직행하기 위해서 자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사순시기를 생략하고 부활절로 직행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완전한 자격을 갖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1,6-7.공동번역)."

 

 

 

 

  <사순 제2주일>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3월의 첫날입니다. 학생들은 새로운 학년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반,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교과서와 함께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보좌신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성소국은 예비 신학생들을 도와주고,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분야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좋은 음악을 떠올릴 것입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한 폭의 그림을 생각할 것입니다. 금융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경제적인 이익과 손실을 따질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봄이 오면 무엇을 심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세상은 악취가 풍기는 더러운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안하고, 허무하게 보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 욕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양육강식의 전쟁터처럼 보일 것입니다.

 

보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놀릴 생각으로 무학대사의 드러난 겉모습을 꼬집어서 그대는 돼지처럼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바라보면서 왕께서는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나는 그대를 놀리려고 돼지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부처님이라고 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뼈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세상이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세상이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이 말에 태조 이성계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둠이 깊으면 밝은 빛이 드러나는 새벽이 가까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 일들이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며, 세상 모든 것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한편의 그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들을 데리고 묵묵히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는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려하고, 아들은 아직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할 때,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리며, 제물로 쓸 을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려는 믿음을 보여 주었으니,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성서 말씀에서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려하는 아브라함이 비정하다고 하는 생각, 죽을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가는 아들 이사악이 불쌍하다고 하는 생각은 올바른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생각이야 할 수 있지만 오늘 성서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아버지의 비정함, 아들의 불쌍함은 아닐 것입니다. 삶의 기준이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따르기 보다는 나의 욕심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자 뿔뿔이 도망을 갔던 제자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재물 앞에서, 명예 앞에서, 권력 앞에서 우리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해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더욱 멋진 그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3명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자 분위기는 바뀌고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더욱 놀라운 일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선조들 중에 가장 위대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여기에 초막 3개를 지어서 살고 싶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다른 둘은 모세와 엘리야께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환하게 변하셨을 때 입었던 옷의 재질은 무엇인지, 제품은 어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산위에 지을 초막의 가격은 얼마일지, 앞으로 가격이 오를지, 내릴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잔잔한 파도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산이 깊어야 계곡의 물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풍요롭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면서 사공은 배를 운전하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들은 세상의 시련과 갈등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 시련과 갈등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 시키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둠도, 칼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죽음도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박혜경, 변화산상의 예수님, 혼합재료 Mixed media, 2002.jpg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오랜만에 낯선 곳을 여행하다보면
"아~ 여기서 살면 참 좋겠다" 생각이 드는 멋진 곳도 가끔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행 후에 늘 느끼는 것은
"뭐니해도 내 집이 최고다"는 것이지요.
새로운 만남이나 경험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평생사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내 삶의 현장과 나와 관계 맺고있는 사람들이
내가 가장 편안하고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곳입니다.
너무 익숙해져 있어 그걸 매일 느끼지 못할 뿐이겠지요.

내가 사는 집
내가 하는 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이곳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의 현장입니다.

오늘 나의 그 하느님 나라를 다시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봅시다.
"아, 참 좋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지켜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창세1,27)을 잘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판을 받았고,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도 산이었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우리도 가끔 산에 올라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변하셨습니다.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9,5)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께, 하나는 모세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엘리야나 모세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그 영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죽은 지 수백 년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신약은 구약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엘리야, 하느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당했듯이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고통을 당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하얗게 빛난 옷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오게 될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고백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라고 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영광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나가라는 위로입니다.

 

이제 이 흰 옷은 곧 우리의 옷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허물과 후회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2코린7,1)하게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 하얗게 빛나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머물고 싶어 한 것을 보면 좋긴 좋았나 봅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의 모습”(창세1,27)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숨”(창세2,7)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고 하셨지만 그곳에서 찾지 않고 헛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변화되어 아름다움을 가꾸기도 해야 하지만 먼저 내 자신이 아름다움자체라는 것을 일깨우고 그것을 지키고 가꾸려 노력해야 합니다. 결코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지 말고 내 삶을 그리고 삶의 터를 꽃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보면 욕심을 내고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보석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큰 보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산에서 내려온 것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산에서 내려온 것은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하게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산에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 감당하기 어려운 곳으로 내려오셔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광야에서 앞길을 인도한 것이 구름기둥, 불기둥이었듯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결국 아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 하느님의 명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데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주님의 말대로 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본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에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회개라는 것도 우리가 큰 죄를 지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마음에 소홀함이 있다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며 온 삶이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시고 ‘참 좋다’ 하시길 희망합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여자의 나이를 묻지 마세요, 그것은 여자의 주름살을 살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수입을 묻지 마세요, 그것은 얼굴에 흉터를 살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지 말고 자존감을 살려줄 수 있길 바랍니다.

 

**결혼하는 남자에게는 라디오가 필요 없답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끊임없이 수다를 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녹음기를 살 필요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별 의미도 없이 지껄인 남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말조심 하십시오. 그리고 여자들이여, 쓸데 없는 말을 줄이십시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나해 사순 제4주일] 하느님 사랑.(요한 3,14-21)15.03.15조회 85[사순 제3주일] 성전정화 (요한 2,13-25).15.03.08조회 61<사순 제2주일> 거룩한 변모사건 .(마르 9,2-10)15.02.28조회 55[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르코복음 1,12-15).15.02.22조회 106[연중 제6주일] 나병환자 치유 (마르 1,40-45).15.02.13조회 104[연중 제5주일]+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 마르코 1,29-39)15.02.08조회 120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주님께 바쳤다.15.02.02조회 54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28)15.02.01조회 115밀과 가라지 (마태 13:24-43) 故이계광 세례요한신부님15.01.30조회 54연중 제3주일]부르심과 응답 ( 마르 1,14-20)15.01.25조회 52연중제2주일: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15.01.18조회 56하느님의 어린양(김웅렬 토마스 신부님 연중2주일 강론)15.01.16조회 58대림 제4주일]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14.12.20조회 93연중6주일 **율법의 완성 (마태 5,17-.37)14.02.16조회 405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마태 2장 1-12절)14.01.05조회 108♡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13.12.08조회 154연중 제33주일/루카 21,5-1913.11.16조회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