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 제4주일] 하느님 사랑.(요한 3,14-21)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사순 시기의 여정을 동반해 온 전례는 이제 점점 더 큰 희망으로 구원의 기쁨을 예고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기쁘게 응답하며, 다가오는 부활을 준비합시다.
역대기의 마지막 단락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귀환을 허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 멸망을 겪었어도, 그 파멸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역대기는 앞날의 희망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역대하 36,14-16.19-23)
하느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하시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준비하셨다(에페소 2,4-10).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을 때에는 빛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빛을 피해 숨는 이들도 있게 된다. (요한 3,14-21).
시편 137(136),1-2.3.4-5.6(◎ 6ㄴㄹ)
◎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
○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 가락 불러 보아라.” ◎
○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
○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들어 올려진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의 특징적인 용어입니다. 요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때를 예수님께서 현양되시는 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이 드러나는 때라고 표현합니다.
요한 복음서 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심지어 그분께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시기마저도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시기, 표징을 보여 주시는 시기로 이해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야말로 비로소 현양의 때, 영광의 때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이 비참하게 처형되는 순간에 불과하고, 좀 더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무죄한 의인이 이 세상의 권력에 불의하게 희생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당신 외아드님이 가장 무력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기에 하느님의 아드님, 창조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 신성을 지니신 그분께서 불의한 힘에 의하여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힘의 행사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생명을 바치시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의 권세보다 강한 예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전능, 예수님의 현양은 그 전능을 드러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또 '만나'는 진저리가 난다고 불평하다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들에게 물려서 많은 사람이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살려 달라고 빌었고,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지시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 물린 사람이 그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 21,4-9).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 뱀은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것은 믿음과 회개를 뜻합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반역하는 자들은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믿음과 회개가 중요합니다.
(구리 뱀 자체에 무슨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해도 아무런 효력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죄와 죽음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모세가 들어 올린 뱀처럼 사람들에게 용서와 생명을 주는 구원의 상징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은 십자가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에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만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하고, 믿음을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사실 인간적으로는, 또는 세속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자기 욕심과 욕망대로 살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고, 악에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생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피곤하다고 느끼고,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를 "자기의 삶이 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빛을 몰라서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사는 것을 싫어해서 자꾸만 어둠 속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과 힘들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 한다면, 즉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일을 스스로 원해서 하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싫어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면, 즉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를 알면서도 그 길을 싫어해서 안 가고,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다른 길을 간다면, 그것은 심판과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신앙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 또 우리가 가야 하는 그 길의 끝에서 생명과 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들은 모두 심판과 멸망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또 믿더라도 회개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스스로 심판 받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양심을 속였으며, 자신들의 욕심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벌을 주십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련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뉘우치기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들 구원을 위해 보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돈과 명예, 권력처럼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셨듯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맘과 정성을 다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때 우리는 참된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채워지는 것이기에 사라지지도 않은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사랑하며, 하느님처럼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이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믿음은 순명을 낳는다 반영억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들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 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데, 받는 데만 익숙해 졌지 사랑을 할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고저 한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생각지 않고 주어진 고기에 묶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깁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부르면서도 그저 부를 뿐 그분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내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어 광야의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리면 그 구리 뱀을 바라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 받지 말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는 것,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나중에 죽으면 신부는 입만 천당 간다고 하잖아요. 말만하고 행함이 없으니까, 수녀님들은 귀만 간대요.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여러분은 발만 간대요. 열심히 성당에 오셨으니까요.
다 알아요. 알면 뭐합니까? 알면 바뀌어야죠. 내 삶을 바꾸어야지요. 어둠을 빛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안다고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삶을 빛의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매일 매순간 거듭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어느 한 부분의 구원이 아닙니다. ‘아무개’ 한 인간의 구원이지요.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 모두가 구원 받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3,18).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혜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만나면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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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한 분이 예비자 교리에 열심히 참석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할아버지께 세례식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돌아 가셨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허, 그런 질문하지 마세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마누라의 짓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언젠가 우연히 내 마누라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래도 내 마누라인데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죠?
남의 죄 때문인가요? 아, 내 죄 때문이라고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래요!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에페 2,8-9)
사순 제4주일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로 지냅니다.
사순절에 왠 기쁨이냐구요?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공로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받게된 것을 미리 경축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바로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한 넘치는 기쁨을 성대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잘 살아서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고
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선물을
아무런 댓가없이 무상으로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공로가 많든 적든 죄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와 죽고 나서조차도 모두 공짜 인생입니다.
그러니 그저 감사할 일뿐입니다.
공짜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감사할 것 외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 한껏 감사드리는 날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