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사순 제5주일] 한알의 밀알 (요한 12,20-33)

2015. 3. 22. 오전 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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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사순 제5주일]  한알의 밀알 (요한 12,20-33)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때’,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실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밀알처럼 죽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에레미야/렘부란트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에레미아선지의 고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듯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을 약속하신다. 시나이에서 맺었던 계약을 이스라엘이 깨뜨렸어도,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다시 맺어 주신다. 새 계약은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하기 때문에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 (제1독서예레미야 31,31-34).

 

예수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새 계약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심으로써 맺으신 계약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제2독서히브리서 5,7-9).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괴로워하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시지만, 당신의 죽음을 피하려 하지는 않으신다. 당신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많은 이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복음 요한 12,20-33).     

                  

시편 51(50),3-4.12-13.14-15(◎ 12ㄱ)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     

 

2009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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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삶은 씨앗과 같은 삶, 죽어 열매를 맺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레미야서에 예고된 새 계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셨다고 강조하는데(히브 8장 참조), 그 새 계약이란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루어진 계약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새 계약을 위해서 오셨고,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해 주는 내용입니다. 여기까지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2,25 참조).
결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경쟁 사회, 아이들 땅따먹기 놀이를 하듯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고 더 커지려고 애쓰는 세상, 남들보다 늘 우월적 지위를 누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 제발 세상모르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바꿀 수도 없고, 예수님의 삶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나’라는 밀알 하나를 보전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 수는 없습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하여 ‘나’를 미워할 수 있을 때,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위하여 내 이익을 포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밀알 하나>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나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어린양의 희생이다(요한 1,29). 2. 나의 죽음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는 일이다(요한 10,18). 3.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요한 10,17).  4. 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다(요한 16,33).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면서 밀알을 땅에 심은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죽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다음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이겼고 예수님이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할 때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 예수님은 '생명의 영도자',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이 마음대로 죽일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은 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심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심으신 일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이 말씀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를 "나만 따라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스스로 희생하는 밀알 하나가 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 즉 우리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희생'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희생하라고 강요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 (강요당한 사람 쪽에서는 희생이 될 수도 있지만 강요한 사람 쪽에서는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와 신앙이 없어도, 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희생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숭고한 희생을 하는 사람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도자들이 자기는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희생하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진짜 지도자라면 자기가 먼저 희생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독재자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런데 그걸 알면서도 실제로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 말씀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반대로 그런 집착을 버리고,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또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권고하시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필요한 것도 많고, 그래서 모으고 쌓아두는 것도 많고,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도 늘어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늘어납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버려야 할 때 망설이지 않고 바로 버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집착하고 망설이다가 버리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밀알 하나의 희생'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잠깐 동안 자기 자신을 버리는 '지혜'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지혜'를 추구하는 생활입니다.

 

[밀알 하나] 납골당과 유해 봉안소 건립 / 이규철 신부님예언자와 여선지자들 - 미켈란젤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26)     -유광수 신부-

제가 이 복음 묵상을 쓰고 있는 곳은 여주군 강촌면 도전리라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밭에 심어 놓은 고추, 콩 등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고 논에 심어놓은 벼들도 원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올해는 대풍년이 될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만큼 하느님의 섭리에 잘 순응하는 것도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 쬐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추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려가며 받아들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옴추르며 그대로 견뎌낸다. 한번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나간다.

 

봄에 푸른 옷을 입히면 푸른 옷을 입고, 가을에 단풍 옷을 입히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에 옷을 벗기면 앙상한 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이토록 하느님께 순응하건만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섭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기를 든다.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하느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병들고 나약해지고 추하게 변해간다. 인간이 하느님께 순응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해 갈 텐데....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른다. 자연이 아는 진리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진리대로 살고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이 알아듣고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봄에 뿌린 벼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벼가 나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듯이 인간도 자라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은만큼 자라야 한다. 인간이 자란다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 죽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평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순순히 순응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툭하면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악을 쓰고 대들고 이를 갈며 투덜대는 것이다. 벼들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 말고 다소곤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나이 먹음의 무게이다.

 

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겸손을 라틴어로 "humilt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가장 낮은 곳이며 누구나 밟고 다닌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이 어른,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서양사람 동양 사람 흑인,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살인자이거나 강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밟고 다녀도 불평이나 거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비를 받아들이고 햇빛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침을 뱉으면 침을 받아들인다. 추위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받아들인다. 대소변을 받아들인다.

땅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불평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준다. 그것이 땅의 겸손함이다. 그것이 땅의 봉사요 섬김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요 섬김, 자연에 대한 봉사와 섬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래서 땅이라는 humilta라는 단어는 겸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떨어져 고개를 떨구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거부하고 겸손의 미덕을 멀리하고 있는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팔팔하고 뻣뻣하다. 모두 다 자기가 잘났고 왕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다 떠받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꼬라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감옥의 간수장이가 랍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당신은 성서 말씀이 영원하며,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간수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시대마다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네 세상에서 어디쯤 도달했느냐? 너에게 주어진 햇수와 날수가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너는 마흔여섯 해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자기 나이를 언급하자 간수장은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랍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지만 속 마음은 떨렸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신다. 부버에 따르면 이 결정적인 마음 살핌은 인간에게 있어 영적인 길의 시작이다.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너 어디 있느냐?'고 하는 목소리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채 헤메이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 목소리에 직면했고, 자기의 곤경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하였다.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삶의 지도에서 '현 위치'와 같다. 지하철 역 안내판의 '현 위치'에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지점을 확인하고 나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밀알 하나눈물의 선지자 에레미야

 

 철학 시간에 ‘Identity'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정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하는 사물은 형상과 질료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범죄자들에게 법을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경찰이 그런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면 정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돌보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의사가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 의사로서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학생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학생이 배움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서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 성인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았고,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것을 명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목적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아는 수녀님께서 재미있는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인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십계명이었습니다.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 일일이 따지지 말고 살자.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감정은 때로 우리의 이성을 따르지 않곤 합니다. 그래서 때로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것도 지혜입니다. 순간 욱하는 감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 낭패를 봅니다.

: 이 자리에서 들은 것을 저 자리로 옮기지 말자. 특히 상대방에 대한 험담은 돌고 돌아서 나와 이웃의 관계를 멍들게 합니다.

: 삼삼오오 정겹게 지내자. 웃는 사람에게는 웃을 일만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불어 웃고 지내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 사생결단 내리지 말자. 모든 것은 다 지나가지 마련입니다. 때로 웃자고 하는데 죽자고 대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 오기부리지 말자. 때로 자존심 때문에 객기를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틀린 것을 깨끗하게 인정할 때 오히려 존경을 받습니다.

: 육체적인 스킨십을 자주하자. 좋은 말입니다. 자주 안아주고, 악수하고, 박수를 치면 몸 안에서 좋은 기운들이 생겨납니다.

: 70%만 만족하자. 백 프로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감사한다면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 팔팔 뛰는 심장이 있음을 잊지 말자. 때로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앞만 보고 뛰는 것은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 쉬어가고, 뒤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 구구하게 변명하지 말자. 그렇습니다. 악취는 덮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털어내는 것이 현명합니다.

: 10%는 무엇이든지 사회에 환원하자. 신앙인들은 십일조를 이야기 합니다. 내가 가진 재능, 재산,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쓸 때, 그것이 삶의 보람입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만 살아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십계명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성서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약과 새로운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계약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름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운전을 하다보면 운전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말을 잘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수천 번 수만 번 되풀이하기 때문에 아이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르는 삶,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산이 높다고 해서 오르지 않고 산만 탓한다면 그것 또한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누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타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가 오웅진 신부님처럼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면서 꽃동네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걸음입니다. 지금 내가 내딛는 한 걸음이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도 하늘의 성인과 성녀들처럼 그렇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대지가 살아나듯이, 꽃이 피어나듯이, 우리들의 마음에 새로운 법을 심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에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했으면 합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밀알처럼 묻어둔 추억 하나 하나를 저 노을속으로.......

 

죽는 것이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서광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또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하신 중에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하고 기도하신다. 이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밀알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해 구원될 인류를 나타내는 예언적 상징이다. 십자가의 제사는 원죄 이후 한시적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바뀌게 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우리들 목숨은 마치 작은 옹달샘에 고인 물처럼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양치기가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우리로 몰듯이, 늙음과 죽음도 역시 사람 목숨을 몰고 간다. 허공에 숨어도, 바다 속에 숨어도, 산중 굴에 숨어도 현세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옛날 어느 마을에서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 부모는 "누구의 자식이냐?"며 딸을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딸은 "동네 윗 절 백은 스님 아이예요"하고 엉뚱한 이름을 대고 말았다.
덕망 높은 스님의 짓이라는 데 놀란 부모는 스님을 찾아갔다. 부모가 "미거한 딸을 돌보아 주시어 혈육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자 스님은 담담히 "아 그래요?"할 뿐이었다. 마침내 딸이 아들을 낳아 부모가 그 사실을 알려도 스님은 "아 그래요?"라고만 했다. 괴로운 딸은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진실이 밝혀져 부모가 스님을 찾아가 사과를 하자 스님은 "아 그래요?"하고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유교적 인습 속에서 다른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을 때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과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다. 지금 우리는 그들에 비해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믿음을 위해 육체적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기상황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부당한 대우나 모함 등 인욕을 치러야 할 암울한 경우는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도 포함된다. 정신적 죽음 앞에서 동요됨이 없이 백은 스님 같이 의연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고추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견디기 위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맹인 3년 동안 자신을 죽이며 살았다고 한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이런 속담은 그야말로 쾌쾌한 옛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인내와 겸손, 관용과 용서 같은 영신 적 순교가 아니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 삶에서 무엇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어떻게 그분 예언직과 사도직, 왕 직을 수행한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시어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다. 신앙 안에서 죽는 것은 사는 것이며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이 놀라운 기적은 유혈(流血)없는 미사의 형식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인류 종말까지 재현되고 지속될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가 받은 수모나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숨진 예수님을 품에 안고 우주를 잃은 것보다 더 공허했을 성모님의 비통함을 생각하면 우리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영적 죽음을 견디어 봉헌함으로써 관념적 신앙인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신앙의 여정에서 순간순간의 죽음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밀알하나] #152 속도와 무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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