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너의 임금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 13-19)

2015. 3. 29. 오전 7:33:49

글자

 

<주님 수난 성지 주일>(2015. 3. 29.)

너의 임금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 13-19) (마르 11,1-10)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나뭇가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축복한 나뭇가지, 곧 성지(聖枝)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곳임을 아십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은 머지않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주간을 시작합시다.

너의 임금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 13-19)

12 이튿날, 축제를 지내러 온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13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이렇게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14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앉으셨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였다. 15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17 그리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실 때에 그분과 함께 있던 군중이 그 일을 줄곧 증언하였다. 18 군중이 이렇게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것은, 그분께서 그 표징을 일으키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마르 11,1-10)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4,1─15,47<또는 15,1-39>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3.14) 이 외침이 이천 년 전 유다인들의 외침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열렬히 환영하던 이들이 불과 며칠 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면,

우리 또한 무의식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고함을 지르는 무리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들은 두 복음,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복음과 예수님의 수난기는 더할 수 없는 대조를 이룹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모든 일이 한 주간 사이에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이 한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사람이 온전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군중이 빌라도에게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도 수석 사제들이 그들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고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군중의 부추김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줍니다.
군중이, 그리고 빌라도가 자유롭고 소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리와 정의 앞에서 어느 만큼 자유롭습니까? 윗사람이나 지도자들이 우리를 선동해도 정의를 지킬 수 있습니까? 군중이 나의 위치를 위협해도 진리를 옹호할 수 있습니까?

“주님, 저도 정의에 눈을 감아 버리고 소신과 줏대를 접어 둔 채, 체면이나 군중 심리에 휘둘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예수님을 따라서>

송영진 모세 신부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7-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의 나라를, 또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하신 일입니다. 입성 장면을 보면, 마치 어떤 군대의 장군이나 왕이 한 나라를 정복한 다음에 정복자로서 그 나라의 수도로 진군해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인데, 예수님의 행렬은 실제로는 아주 작은 규모의 초라한 행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도 그렇게 수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시민들에게 당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한 상징적인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입성 당시에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고, 세상에 참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신 분입니다. (장군들이 타는 말은 전쟁과 교만을 상징합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가장 작은 차를 타기를 원하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기 위해서이고,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작은 차를 타라고 권고하신 것은 가난을 실천하라는 뜻도 있고,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저축하고, 그래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세속적인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가난과 겸손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렇게 살겠다고 공적 서원을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집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서 살면서, 또 보통 사람들이 타는 차보다 훨씬 더 좋은 차를 타면서, 예수님의 겸손과 가난에 대해서 강론을 한다면, 그게 바로 위선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들의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깔아 놓은 것은 당시에 왕의 즉위식 때 왕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던 행동을 따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 놓은 행동을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표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사제가 입고 있는 사제복,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처럼 옷이 신원, 신분, 직업, 계급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부자들은 비싸고 좋은 명품 옷을 입고 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그 반대일 것이고...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욕심, 욕망, 이기심 등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사람들은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몰랐거나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고, 다시 그 뒤로는 부활과 승천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십자가를 거부하면 부활과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입니다. 누구에게나 각자 자신의 몫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자기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지주일

 

끝까지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9)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렬히 환영을 받았습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2.23)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27,29)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감탄고토’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환영받던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며 중풍병자가 일어섰고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서니까 마음들이 완전히 돌변하였습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 배신자! 누구? 은전 서른 양에 주님을 팔에 팔아먹은 유다, 십자가 죽음 앞에 도망간 제자들...우리는?)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 빼기에 익숙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하며 속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던 모습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에 이 사람이 참된 사람인지 거짓된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풍수지리를 본다고 하다가 마음의 혼동을 가져와 신경쇄약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묘지를 잘 쓰면, 조상이 복을 줍니까?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성당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가정에나 밖에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하며 흉보고 욕하며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유치원은 왜 보내고, 학교는 왜 보냅니까? 더군다나 학원은 왜 보내요? 돈 들여가면서.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부모의 의무는 일상이나 신앙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27,46)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 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간청합니다.

성모님의 삶의 여정을 보면, 나약함과 비참함, 예기치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셨고, 희망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마음을 혼란케 하는 말씀을 들으셨던 재수가 없는 여인 이었고, 남편 요셉에 대해 걱정을 해야 하는 근심하는 여인이었으며 아들을 마굿간에서 출산을 해야 했던 딱한 여인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칼날을 피하여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길에 올랐던 비운의 여인, 아기를 율법의 규정에 따라 성전에 봉헌했을 때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던 비통의 여인이셨습니다.

 12살 난 소년 예수를 성전에서 잃고 애태웠던 여인,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를 철저히 남에게 빼앗겨야 했던 처절한 어머니,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어야 했던 애간장이 녹아난 어머니, 죽은 아들을 가슴에 껴안은 채 소리 없이 애통해하던 기구한 어머니셨습니다(김수환 추기경 강론 참조).

성모님의 놀라움은 그토록 많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셨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성모님의 신앙이 변함없이 살아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성모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도 어떠한 처지,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2015년 03월 29일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셨고, 부당한 재판을 받았으며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맹세까지 했던 제자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고, 호산나라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와 율법학자들은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외로웠던 예수님께서는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절망 중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만든 교주의 삶을 이토록 비참하게 이야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용비어천가를 이야기 합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고, 세상을 떠날 때도 많은 사람들이 애도 하였으며, 참으로 위대한 분이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도 허물을 들추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 잘못은 모두 덮어두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위로와 희망을 준 것들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가톨릭교회는 매년 가장 긴 시간을 정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의 배반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군중들의 무관심을 들추어내는 것일까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죽음은 2000년 전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 진형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역만 바뀌었을 뿐, 예수님의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위선을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손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묻히지 않으려 합니다.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신앙은 없는 건조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재물에는 눈이 밝아지면서 오랜 교회의 전통인 영성에는 메마른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래된 원전은 다수결로 가동되고 있으며, 차가운 바다 속에 침몰한 세월호는 1년이 지나도록 경비가 많이 든다고 인양하지 않으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현장에는 무서워 도망을 간 제자들처럼 종교의 지도자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해야 할 배우자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었던 친구의 등 뒤에서 비수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리당략을 위해서 국민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돈을 받아먹고 국가의 안전을 지켜내는 무기들을 엉터리로 사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서 사람들을 기소하고, 소중한 인권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을 멈출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위로와 희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시몬, 부산의 시몬, 제주의 시몬이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이런 시몬들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 데레사, 루시아가 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외로운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분들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부터 성주간 피정을 합니다. 좋은 피정이 되도록 기도부탁 드립니다. 부활 대축일 이후에 묵상 글을 올리겠습니다.

 

성지주일의 종려나무가지(Rami Palmae)란 ?

 

 
<“저는 아니겠지요?”> (마르 14,19)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지옥 갈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암에 걸릴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가족 중 누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게 될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을 것이다.
"저 아닌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엄청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저 아닌가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기에
상상치도 못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저 아닌가요?"


예. 여러분이 바로 그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이라 고백하며 호산나를 외치지만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군중들 사이에서 외치고 있는 바로 그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중인격자가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의 힘든 여정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과 거룩한 성주간을 함께 하십시오.


 성지주일의 종려나무가지(Rami Palmae)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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