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성전정화 (요한 2,13-25).

2015. 3. 8. 오전 6: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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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3주일] 성전정화   (요한 2,13-25).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이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살고자 우리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는 시기입니다. 장사하는 집이 되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허무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성전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하며 그분께 귀를 기울입시다.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어 삶의 길을 가르치신다. 계명에 따른 삶은 이스라엘이 해방된 백성으로 살기 위한 길이었다탈출기 20,1-17).

하느님의 생각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 인간에게 어리석고 약하게 보일지라도, 그 어리석음은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그 약함은 인간의 힘보다 더 강하다(코린토 1서  1,22-25).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인간적인 이득을 찾는 행위를 금지하신다. 인간들이 애써 지은 성전은 무너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전이 되실 것이다.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 2,13-25).

 

계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을 따라 살아감을 뜻합니다. 어쩌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고 나약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은 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거스르고 제한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로 시작하는 십계명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려고 주신 선물, 하나의 이정표였습니다.
계명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맡겼을 때 그 결과는 과연 어떠할까요? 선하게 창조되고 자유 의지로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임을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성전인 인간은 장삿꾼의 소굴이 되어 피폐화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들을 좇아 경쟁 사회에 내몰린 우리의 모습은, 인간의 지혜나 힘이 과연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지 의문을 품게 하며, ‘만물의 영장’이나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합니다.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인간다움을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침몰되어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간다면, 더 큰 ‘주님의 집’인 이 세상에는 이기주의와 분열만이 난무할 것입니다.

당신 몸을 허무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리석고 약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따라 사는 삶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지름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에 장사꾼들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면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에서 장사하지 마라."인데, "교회를 장사하는 기업처럼 운영하지 마라.", 또는 "신앙생활을 장사하는 것처럼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성전에서 장사를 한 것은 원래는 신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물용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았고, 헌금할 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환전을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화폐로만 헌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서 환전꾼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사를 해서 번 돈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차지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의 일부를 가로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장사꾼들은 장사를 하면서 대단히 높은 가격으로 폭리를 취했고, 사제들은 자릿세 명목으로 장사꾼들에게서 뇌물을 받았습니다.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신자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사제들과 장사꾼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일은 일종의 종교개혁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근원을 제거해서 깨끗하게 만드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단순한 종교개혁이 아니라 그 이상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낡은 종교, 형식적인 예배, 개인의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신앙을 없애라는 명령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1)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장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복음과 은총과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에도 당연히 무상으로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면서 장사를 하고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는 말씀은 세상을 향한 교회 활동의 대원칙입니다. 

2) 교회는 기업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고,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운영할 때 회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손익 계산을 해도 안 되고, 흑자와 적자를 따져도 안 됩니다. 같이 굶든지 같이 먹든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을 장사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흥정과 거래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치든지 아예 못 바치든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더 많이 바치면 더 많이 받고, 적게 바치면 적게 받는다는 생각은 우상숭배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상대로 장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나오는데, 그는 필리포스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됩니다(사도 8,9-13). 그런데 그는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를 할 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사도 8,19)."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일에 그대가 차지할 몫도 자리도 없소. 그러니 그대는 그 악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님께 간구하시오. 혹시 그대가 마음에 품은 그 의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쓴 쓸개즙과 불의의 포승 속에 갇혀 있소(사도 8,20-23)."

그 일에서 '시모니아' 라는 용어가 생겼습니다. '시모니아' 라는 말은 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 매매'를 뜻하는데, 우리 교회는 이것을 '대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이 대죄인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과 관련한 문제들입니다. 신앙인 개인이든지 교회 공동체든지 간에 돈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부유하고, 규모가 너무 크고, 손대는 사업이 너무 많고...그러면서 세금은 제대로 내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이런 일들은 다른 종교, 다른 종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르 11,17). 교회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그 어떤 구별도 차별도 없는 곳, 누구나 와서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유한 사람들의 친목 단체처럼 변질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 법이 잘못 사용되면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아도 잘못된 판결이 참 많았습니다. 법관들이 법을 몰라서가 아닐 것입니다. 법관들이 지혜롭지 않아서가 아닐 것입니다.

법관들이 법을 적용하기에 앞서 또 다른 힘 앞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와 같은 것들은 과거에 억울하게 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직입니다. 잘못된 판결을 한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밝혀주고 억울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가족들에게도 위로를 주기 위한 조직입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도 법과 규율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법은 세상의 법보다 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 조직, 성사, 사람에 대한 법들이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교회법을 3년 동안 배웠습니다. 법은 신앙을 보호하고, 신자들이 하느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법도 예수님의 말씀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교회가 잘못 판결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회가 잘못 판결한 사건들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교황의 진실한 행동에 대하여 존경과 사랑을 보내 주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체형이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제가 학교 다닐 때보다 키가 20cm는 더 자라고 있습니다. 다리가 길어져서 더 멋있어 보입니다. 이는 영양상태가 좋아졌고,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먹는 것이 절박했습니다. 우리의 몸에 들어온 지방은 쉽게 분해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지방을 섭취할 때까지 우리의 몸은 최대한 지방을 저장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것을 유전자로 만들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방은 가능한 한 천천히 분해되도록 하고, 일단 몸에 들어온 지방은 필요가 없어도 저장하도록 진화하였습니다.

 

산업혁명, 농업혁명, 경제발전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지방을 섭취하게 되었습니다. 며칠씩 사냥을 하지 않아도 동네 마트에 가면 음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음식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영양분들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필요한 만큼 소비가 되고 다시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차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지방은 우리의 몸에 들어오면 필요한 만큼 소비를 했어도 계속 체내에 쌓이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예전에 수렵하고, 채집을 하던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환경 변화가 인간의 몸의 변화보다 훨씬 빨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던 지방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던 지방이 이제는 우리의 건강, 생명을 위협하는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비만으로 초래되는 질병입니다. 이는 심장계 질환, 당뇨, 고혈압, 관절염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스스로 정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몸이 지방 분해 효소를 만들기까지 과도한 지방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몸에 쌓인 지방은 쉽게 배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방섭취를 줄이고, 자주 걷고, 운동을 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주 웃는 것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들의 마음이 참 편했습니다. 가끔 하늘을 보고, 떠가는 구름에 마음을 담았습니다. 들에 핀 꽃을 보고 웃었으며, 흘러가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 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동네에서 놀았습니다. 자연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도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듯이 세상의 것들은 그렇게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 신문, 방송, 책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하고, 우울해 하고,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할까요?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우리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돈, 권력, 명예라는 우상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너무나 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탐욕이라는 우상은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게 하고, 소중한 이웃들을 탐욕의 대상과 수단으로 삼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이웃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것들이 주는 유혹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탐욕과 우리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십억 년 이어져온 자연의 질서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자연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올지 모릅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태도와 양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약함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구원의 표징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요한 2,15)

예수님이 분노하시네요.
여러분은 어떤 때 분노하시나요?
언제나 허허 하며 살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화가 치밀어 분노하고나서는 돌아서서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좀더 참을껄...

그런 경우는 우리의 분노가 감정조절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론 분노해야 합니다.
내가 무시당하거나 내가 몰이해받아서 화를 내어
나의 정당함을 관철시키는 것은 의노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하느님의 뜻이 인간적인 욕심에 의해 무참히 짓밟힐 때 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부자들과 기득권층들의 욕심 때문에
인격적 대우와 일단 댓가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나만 잘 되겠다고
내 나라만 잘 살겠다고
내 가족만 잘 되겠다고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화가 나게 되면
왜, 무엇 때문에 내가 분노하는지 한번 살펴 봅시다.
나의 분노가 과연 예수님의 의노를 닮았는지...

화를 내더라도 멋진 화를 내시기를...

 오상선 바오로 신부

 

 

마음의 성전을 가꾸어라   반영억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요, 주님이신 성체를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2,14-15).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평소에 온순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지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긴장하게 되는데 바로 그 모습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각 성당에도 성물방이 있고, 쉼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나 신자들이 기도를 잘 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맙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손에 땀난다.’,‘손 떨린다’고 말합니다. 왜 손에 땀이 나고 손이 떨릴까? 분명 이유 없이 땀나거나 까닭 없이 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긴장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손이 떨리고 땀나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그 원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치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고해성사를 보고 나와 제대 앞에 나와 두 손을 합장하고 짧게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본 신부님이 ‘할머니 무슨 기도를 하셨나요?’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삼종기도를 했지요.’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다시‘할머니, 삼종기도 하실 줄 아세요?’했더니 할머니께서 ‘그럼요, 땡, 땡,땡’아닌가요?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분들이 성당을 은총이 충만한 성당이라고 고백하고 성당을 다녀오면 구원을 얻고 평화를 회복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나드는 성당이 기도하는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가득차 주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래전에 멕시코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과달루페성모님이 모셔진 성당을 비롯 300년 이상 된 성당을 위주로 여러 성당을 방문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당 규모나 조각, 그림 등으로 보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성전을 가득 메워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미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관광지로써 순례객을 맞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성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역사가 오래된 건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 성전을 누가 다시 아름답게 빛나게 할 것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번 한 주간 일상 안에서 성전이신 주님을 잘 모시고 우리 자신의 성전도 거룩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으로 기도의 집을 자주 찾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각을 바꾸라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렵지만 이곳을 찾아와서 소와 양,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며 제사를 지내고 예배를 하였습니다. 지나치게 공간 개념에만 얽매여 성전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성전입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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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이 못생겼다고 고민하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 느 날 그는 의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 손이 너무너무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의사가 즉시 말했습니다. “딱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가씨의 손을 떼어 내든지 아니면 아가씨의 눈을 떼어내든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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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운 사람이 옆에 있어요, 어떻게 할까요? 눈을 떼어내든지, 아니면 사랑하든지. 아무튼 성전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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