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요한 20,1-9)

2015. 4. 5. 오전 8:30:17

글자

 

<예수 부활 대축일>(2015. 4. 5.)(요한 20,1-9)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후렴).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예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죽음의 권세에 묶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부활의 빛을 우리 안에 가득 받아들일 수 있도록, 깊은 믿음으로 사도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입시다.     

부활 시기 동안에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의 말씀이 선포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처음부터 줄곧 그분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뵙고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10,34ㄱ.37ㄴ-43)     콜로새서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권고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콜로새서  3,1-4)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다른 곳에 모셨다고 생각한다. 빈 무덤을 본 이들이 곧바로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부활 신앙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체험으로 가능하며, 그것마저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동반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20,1-9).     

 

시편 118(117),1-2.16-17.22-23(◎ 24)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또는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

 

<부속가 :오늘은 의무이고, 팔일 축제 동안에는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아직도 어두울 때' 라는 말은 마리아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생각하고 부활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슬픔에 빠져 있는 마리아의 마음은 몹시 어두웠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것은 시신을 보기 위해서이고,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마르 16,1). 공관복음을 보면 마리아 혼자서만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함께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여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르 16,5; 루카 24,3).

루카복음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예수님은 '살아 계신 분'이니 무덤에서 찾지 말고,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셨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여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다고 기록했습니다(루카 24,8-9).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여자들이 바로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 소식을 알렸다고 기록했고(마태 28,8),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여자들이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마르 16,8).

(이렇게 복음서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른 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이 사람마다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그들이 모두 결국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증언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시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복음서 저자는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만' 이야기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요한 20,2). 말하자면,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죽으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다가 안 보이니까 제자들에게 가서 그것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간 것도(요한 20,3-4) 예수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즉 '죽으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나중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요한 20,14),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됩니다. 제자들도 모두 '그날 저녁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요한 20,19).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지 말라는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살아 계신 분'을 믿는다면, 우리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 (마태 23,29)." 만일에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예언자들의 무덤이나 만든다면, 또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는 일만 잘한다면, 그것이 바로 죽은 신앙입니다. 

또 '살아 계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지 않고,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부귀영화 같은 현세적인 복만 바란다면, 그것도 역시 죽은 신앙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썩어 없어질 양식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양식과 함께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만일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그런 죽은 신앙에 빠져 있다면, 성전은 죽은 예수를 기념하는 무덤이 될 뿐입니다. 성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하느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계시는 분'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에페 4,15-16.공동번역)."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야고보서 저자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이기적인 생활을 한다면, 즉 '죽은 믿음' 속에서 산다면,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이 없다면, 부활절은 죽은 기념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랑을 미루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나중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화답송). “나는 죽지 않으리라.”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죽지 않는 신들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는 천부적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 있음에도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 때문에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은 채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 차라리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안락사, 존엄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결코 “나는 죽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삶을 사랑하지만, 늘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 안에서도 부활 축제를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와 같은 증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압니다. 세상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주님을 죽였고, 자기 자신들마저도 죽일 수 있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도 그들은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난 이들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 또한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도 사도들의 마음처럼 빛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겠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던 요한만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서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감상에 젖어 모성애의 시각에서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 사도처럼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이 빈 무덤을 관찰합니까? 아니면 요한 사도처럼 인격적인 사랑의 시각에서 이 무덤을 바라보고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을!    반영억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날을 경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부활축하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이 기쁘십니까? 왜? ‘나도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죠.’죄인인 내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영원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순절이 끝나서 기쁘답니다!!!!” 절제와 희생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었나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희생과 속죄,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십자가를 구원 받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고 아울러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부활은 희망의 사건이고 절망을 거두는 승리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의 절정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죄와 죽음의 지배는 사라지고 영원한 세계로의 희망이 열린 것입니다. 인류는 주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소식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활의 생명을 마음껏 감사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삶이 어떤 열매를 맺어주는 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결국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지구에 돌아와 “아무리 우주를 돌아보아도 하느님은 안 보이더라”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신부님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우주를 많이 돌더라도 하느님은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답니다. 부활의 기쁨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귀하게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는 것이 부활의 큰 진리입니다”(미국 필립스 브룩스주교).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좌절과 절망을 가져왔지만 부활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미움과 분노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 희생과 봉사, 사랑의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영원한 천상행복의 약속된 미래를 보고 오늘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지금 나를 도구삼아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통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아들 예수님처럼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오늘 여기서’, 지금서부터 살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8)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더랍니다.
부활은 빈무덤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도 부활하려면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에고를 버립시다.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욕심을 비웁시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50일간 비우는 연습을 합시다.
그래야 텅빈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구나!

비움의 연습을 통해
부활이 무엇인지 더 깊이 체험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진실로 끊어 버립니까? / 글 : 배광하 신부 

알렐루야! 온 세상천지의 만물들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부활은 실로 자유이며 해방이고 다시 살아남입니다.  가슴 벅찬 부활의 감동을 우리는 부활성야의 밤 ‘부활 찬송’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 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이처럼 감격의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부활이 진정 인간사의 모든 속박을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혔던 모든 불목이, 결코 풀리지 않았던 대화와 타협이,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여러 굴레에 묶였던 그 모든 사슬에서 진정 해방되었음을, 부활하였음을, 저 치욕과 죽음의 십자가를 끝내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하여 그 모든 해갈이 이루어졌기에 진정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의 부활은 결코 죽은 송장의 뼈에 살점이 붙어 땅을 뚫고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은 죽음 뒤에 오는 영생의 시작만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 순간 생의 나날에서 부활의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철저한 자기희생의 결과로 얻어지는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민’ 신부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을 돌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부활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던지는 삶의 메시지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은 남을 위하여 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이기심과 욕심으로 현실을 잘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라는 교훈은 진정 옳은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 이래로 끊임없이 고백해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은 ‘부활 신앙’이라고, 그 같은 부활 신앙을 살기 위하여 장엄한 부활 성야의 거룩한 밤, 세례 서약 갱신의 약속을 또다시 살아야 합니다. 죄를 끊어 버리고, 악의 유혹을 끊어야 하며, 죄의 뿌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진정 부활의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 올무이며 사슬인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 부활의 해방과 자유를 맛본 우리에게 사도 성 바오로는 옛 죄의 종살이에 매이지 말도록 일깨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 1).
진실로 믿습니까?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첫 시작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사실 신앙은 믿음입니다. 도대체 동정녀가 아들을 가졌다는 믿지 못할 성경의 가르침, 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이 모든 믿을 수 없는 신비의 고백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의 신비를 그대로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첫 걸음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와 믿음이 이 놀라운 기적의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 옛날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부활을 설명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뒤늦게 깨달았던 제자들의 뜨거운 감동을 우리 또한 느끼도록 만들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스스로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했던 슬픈 죽음을 체험한 이들의 통곡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서글픈 죽음, 조국과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인간 존엄을 위한 민주와 박애를 위하여 헌신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의 죽음은 허무한 절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그 부활 믿음을 사는 우리는 또다시 부활 성야의 장엄한 예절 중 세례 서약 갱신의 믿음 고백을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믿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체념과 좌절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신앙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할 부활의 의무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사는 신앙인들의 자세는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 2)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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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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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증인이다 (루카 24,35-48)15.04.19조회 115[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15.04.12조회 56[예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요한 20,1-9)15.04.05조회 58<부활 성야>나자렛 예수님은 되살아나셨다 (마르 16,1-7)15.04.04조회 54[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요한 18,1-19,42)15.04.03조회 114[주님 만찬 성목요일]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요한 13,1-15)15.04.02조회 60<주님 수난 성지 주일>너의 임금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 13-19)15.03.29조회 54[나해사순 제5주일] 한알의 밀알 (요한 12,20-33)15.03.22조회 55[나해 사순 제4주일] 하느님 사랑.(요한 3,14-21)15.03.15조회 85[사순 제3주일] 성전정화 (요한 2,13-25).15.03.08조회 62<사순 제2주일> 거룩한 변모사건 .(마르 9,2-10)15.02.28조회 55[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르코복음 1,12-15).15.02.22조회 107[연중 제6주일] 나병환자 치유 (마르 1,40-45).15.02.13조회 104[연중 제5주일]+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 마르코 1,29-39)15.02.08조회 120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주님께 바쳤다.15.02.02조회 55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28)15.02.01조회 115밀과 가라지 (마태 13:24-43) 故이계광 세례요한신부님15.01.30조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