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증인이다 (루카 24,35-48)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제자들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어,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고난을 겪고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는 그들을 증인으로 파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도 비추어 주시기를 청하면서 그분의 제단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찬미합시다.
베드로 사도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행전 3,13-19)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지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 ( 요한 1서 2,1-5ㄱ)
복음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 (루카 24,35-48)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오늘의 묵상]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돌판에 새겨 기억하라 반영억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당신을 내 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55,8.9)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에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는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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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의지(계획)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등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각본대로 된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거나 거부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은 뒤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죽여도 하느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은
인류를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인간들 쪽에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의 뜻은 '증언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선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물어볼 때에만 소극적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누구든지 내가 자기를 안다고 하느님 앞에서 증언해 주기를 바란다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여라."
'누구든지'는 글자 그대로 '누구든지'입니다.
따라서 '증언'과 '선포'는 모든 신앙인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게 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우리도 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습니다.
(물론 몇 명은 직접 체험하기도 하고, 직접 계시를 받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전해 내려오는 증언과 선포만 들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증언하고 선포할 것인가?
1) 자기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사도들의 증언과 선포가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2) 증언과 선포를 '말로' 할 수도 있지만, '삶으로'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안 믿는 사람처럼 산다면,
그것은 거짓 증언이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 2,4)."
부활을 믿고 희망한다면, 부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현세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래서 '믿음'만큼이나 '희망'이 중요합니다.
지금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따라서 인생 자체가 다르게 될 것입니다.
허무한 것들만 희망하고 집착하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겠지만,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신앙인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만 추구해야 한다."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이 세상도 원래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지막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일입니다.
한눈을 팔면서 중간 경유지에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
우리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