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이면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일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인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현존하시며 평화를 선포하시고 선물도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를 청하고 또한 우리도 그분의 자비를 본받아 이웃에게 선행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사도행전은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가던 신자들의 공동체 모습을 보여 준다. 믿음으로 하나가 된 돈독한 형제애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삶으로 드러났으며, 그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활기차게 증언하였다.(제1독서 사도행전 4,32-35) 요한 1서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기게 한다.(제2독서 요한1서 5,1-6) 복음의 주제도 믿음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의 불행이 아니라 믿는 사람의 행복을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며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요한 20,29)은 행복합니다.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던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못하여 예수님의 상처를 자신의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장담하였으며, 그분의 발현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토마스 사도 이후 이제 교회의 믿음은 눈으로 보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사도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사도들이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고 전합니다. 그 공동체 신자들의 믿음 역시 사도들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가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고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고백합니다. 어제 묵상한 대로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바로 사도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의심 없이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발현을 보고서야 믿게 되었던 토마스 사도보다 행복합니다. 제2독서에서 말하듯이, 그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태어나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토마스 사도처럼 수많은 고통과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게 되며, 더욱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일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하고 선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보고, 그 미래 때문에 미래를 이미 앞당겨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자신의 모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릇에 따라서 모양을 바꾸어 줍니다. 물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줍니다. 갈증이 날 때 마시는 한 모금의 물, 가뭄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지구가 생명이 풍성한 푸른 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공기 없이는 5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입니다. 공기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햇빛이 있습니다. 햇빛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 공기, 햇빛’을 통해서 자비로운 삶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는 지구별입니다. 성공, 출세, 재물, 권력, 명예라는 신기루를 찾아서 끊임없이 오르려고 합니다. 내어 놓으면 볼 수 있고, 멈추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욕심이 쌓아놓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말을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상대방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다면,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너그러워 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보지 말고, 우리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워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자비는 ‘참된 행복’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자비의 승리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료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토마에게도 나타나셔서 “평화를 빈다.”고 말씀하시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를 만났고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제 1독서는 평화를 회복한 제자들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그 세상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뛰놀고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소풍을 가고 독사들이 춤을 추는 그 기쁨의 날”이 온 것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형제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 2독서는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시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물을 받고싶나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려면
마음속에 의구심이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거듭 인사하십니다.
평화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얼마나 용서를 잘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아직 잘 모르겠다구요?
그렇다면 오늘 성령을 청하십시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십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그러면 내 안에 평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부활하신 주님께 성령을 청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비를 닮은 용서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에 충만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정직한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 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 합니다. 어째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믿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더 큰 은혜가 다가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완성을 이루고 기뻐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더 큰 사라으로' 사랑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말은 잘 못하거나 얼굴은 못 생겼는데 말은 잘하면
‘천만다행’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는데 말도 잘 못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 베스트 거짓말
1. 자리 양보 받은 어르신 ; 에구…괜찮은데.. ; 양보 안 하면 속으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2. 정치인 ;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3. 옷가게 ;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맞춤옷 같아요. 얼굴이 뭔 상관있어 매상만 올리면 되지!
4. 음주운전자 ; 딱 한잔 밖에 안 마셨어요. 잔의 크기가 문제지….
5. 친구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조금 있으면 온 동네 다
소문나요!
*** 정직합시다.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에게!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2주일에 폴란드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외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를 보면 자비의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 때에 방에 있었는데, 그때 흰옷을 입으신 주님을 보았다.
한 손은 가슴에 얹으셨고 한 손은 축복하시려는 듯이 들고 계셨다.
가슴에는 두 줄기의 빛이 뿜어 나왔는데 하나는 붉은 빛이었고 하나는 엷은 빛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님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은 두려움에 떨렸지만 큰 기쁨에 넘쳤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네가 본대로 성화를 그려라.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 의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넣어라.
나는 이 성화가 먼저 네가 있는 성당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공경 받기를 바란다...
나는 이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을 멸망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지금 이 상에서부터, 특히 임종 때에 적에게 승리하도록 약속하겠다. 나는 이 성화를 내 영광으로서 지킬 것이다.”
영적 지도신부의 요청에 의하여,파우스티나 수녀는 주님께 성화에 나타난 빛의 의미를 물었다.
다음은 파우스티나가 들은 대답이었다.
“두 빛줄기는 피와 물을 상징한다.
빛이 엷은 빛줄기는 영혼을 의롭게 하는 물을 가리키고, 붉은 빛줄기는 영혼의 생명인 피를 가리킨다...
이 두 빛줄기는 십자가에서 창으로 내 심장을 열었을 때, 내 깊은 자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이 빛줄기는 영혼들을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이 보호 속에 사는 사람은 해복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정의로운 손길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후에 로마 군사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흘러나온 “피와 물”을 표현합니다.
주 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로부터 깊은 자비가 흘러 나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진리를 하느님 자비의 사도’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폴란드) 수녀께 밝히시고 그분 성심에서 분출된 빛줄기가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영혼들을 보호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자비심 축일을 제정하여 모든 영혼들,
특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피난처와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이날 나의 깊은 자비심의 심연이 열린다. 나의 자비심의 샘으로 가까이 오는 영혼들에게 은총의 바다를 쏟아주겠다”고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반열에 올리고 예수부활대축일 다음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이로써 기아와 빈곤과 분쟁과 폭력에 시달리는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 한없는 그분의 ‘자비’뿐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많은 환시와 예언, 그 외에 영적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녀가 체험한 가장 강렬한 환시는 1931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이 환시에서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심 근처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내밀어 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예수 성심에서는 붉은 색과 흰 색의 두 갈래 빛이 나왔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 신심의 이름은 ‘하느님 자비’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체험을 기념하고 아울러 그 그림을 보고 공경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여러 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영적인 지도와 기도의 은총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성녀 파우스티나가 직접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으며, 그 일기는 오늘날 “내 영혼 속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in My Sou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에 기록된 성녀의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둘째, 특히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심 실천을 통해,
온 세상과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 자비의 사도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심 운동의 목표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폐결핵을 비롯한 수많은 고통들을,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던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는 크라쿠프(Krakow)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 녀의 시신은 크라쿠프 라기에프니키(Krakow-Lagiewniki)의 하느님의 자비 묘지(Shrine of Divine Mercy)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일 새 천년기에 처음으로 시성되었다.-가톨릭 홈페이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송영진 모세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요한 20,19-23).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사도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요한 20,24-25).
그랬다가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요한 20,28).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9).
토마스 사도가 안 믿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안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사도들의 말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못 믿은 것은 토마스 사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보고서야' 믿은 사람들입니다.
또 토마스 사도가 다른 사도들의 말을 안 믿은 것에는 사도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사도들에게는 그때에는 아직 변화된 모습이 없었고, 그들이 '말로만' 증언했기 때문에 토마스 사도 쪽에서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나중에 오순절 날에는 완전히 변화된 모습이 됩니다.)
부활 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하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말은 '복되다.', 즉 "하느님의 복을(은총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보고서야 믿은 토마스 사도보다 행복하다." 라는 뜻이 아니고, 또 "보고서야 믿은 토마스 사도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보다 불행하다." 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행복과 불행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의심하지 않고 단순하게 믿는 순수한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의 반대는 '보면서도 안 믿는 사람'입니다. ('본 다음에야 믿는 사람'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의 반대말이 될 수는 있는데, 어떻게 믿게 되었든지 간에 믿는 것은 믿는 것이니까 반대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보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보지 않았지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을 갖지 못할 때가 많고, 그래서 어느 순간에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바치는 사도신경을 보면, 그 내용이 전부 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렇다고 믿을 뿐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일들도 사도들의(복음서의) 증언을 믿을 뿐입니다. 종말, 재림, 심판, 부활, 영생 등은 아직 이루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볼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그럴듯하게 다른 말을 해서, 그 말을 듣고 우리 마음속에 작은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이 믿음을 잃는 일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그런 것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2)." (과학이나 상식을 말하면서 신앙인들 마음속에 의심을 심고, 그래서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도 사탄의 작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환난이나 박해나 시련을 만났을 때 믿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루카 8,13). 편안할 때에는 누구나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겉으로만 하고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루카 8,14). 이 경우는 머리로는 믿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고, 몸도 마음을 따라가서 결국에는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실감이 나지 않는데, 세속의 걱정과 쾌락은 생생하게 바로 앞에 있는 현실이어서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하고, 그래서 쉽게 끌려가고...
(그래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제대로 믿으려면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추종자들, 특히 11제자들의 참담한 심정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체포되던 예수님을 등지고 도망쳤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재판받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의 언덕을 오르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군중들 틈에 끼어 구경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들은 11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스승과 함께 죽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던 제자들은 모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예수님의 힘없는 죽음에 좌절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군인들을 앞세운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체포하러 올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 비겁한 행동으로 신의를 저버린 사람의 특징은 대체로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고
자신 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 거기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폐쇠성입니다.
죄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 바라보게 하는 용기를 빼앗가 갑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의 서두는 바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상황 한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 놓여있는 제자들의 한복판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 한가운데 우뚝 서서 그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시며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불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은 약동하는 힘입니다.
활력이 넘치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성령은 불안과 두려움, 죄의식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그리고 남을 용서해 주는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새롭게 부르십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고 거기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을 주셨음 같이, 죄의식과 불안, 두려움에 빠져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그 어둠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제자들을 일깨워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잔뜩 움츠려 들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환호작약합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 사도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다른 제자들의 흥분된 말에 토마사도는 발끈합니다.
'아 무정한 주님' 왜 하필 그때, 내가 잠깐 하눈파은 사이에 나타나셔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아무리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았다고 해도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고 당신의 뻥 뚫린 옆구리에 손을 집어넣어 보지 않고서는 저 정신없는 다른 친구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토마 사도의 이런 태도는 사실 빈 무덤만이 부활의 증거로 남아 있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으로 느끼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갈등이었습니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얼마나 당연하고 명확한 자기선언입니까?
우리 역시 똑같은 심정이 아닙니까?
'주님'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저로 하여금 확실히 믿게 해주십시요.
'토마는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 그리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이어야 동의하는
현대인의 물질적 사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등하는 토마 사도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이 말씀은 토마사도에게 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지 못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시는 당신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며 믿음이 얕고 너무 쉽게 흔들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과연 이 말씀대로 주님의 부활 발현을 체험한 다른 이들의 증언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실종된 현대 세계에서, 예수님을 뵙고 그 신비에 압도되어 외치는 토마사도의 신앙고백은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거양성체 때 행하여지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바로 토마사도의 기쁨에 넘치는 고백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 주요, 내 천주로소이다!" 라는 신앙고백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외치는 토마 사도의 응답입니다. 한 점의 의심 없이 성체 안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 넘치는 선물을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멘.
부활 제 2주일 - 김오석 라이문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