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2015. 5. 24.)(요한 20,19-23)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시어 그들을 변화시키셨는데, 성령을 받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담대하게 증언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성령을 가득 부어 주시어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깁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일곱 주간이 지났을 때,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린다. 성령께서 그들이 여러 언어로 말하게 하시므로 모든 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로써 바벨탑으로 인해 생겨난 분열이 극복된다.(사도2,1-11)
성령은 교회 안에서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 공동선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는 분도 같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모든 이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다.(고전12,3ㄷ-7.12-1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요한 20,19-23))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 빛, 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 칠은 베푸소서.
덕행 공로 쌓게 하고,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 복락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대자연은 더욱 신비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나무 끝에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지만, 죽은 가지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틀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생물에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생명력이 되고 영혼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계셔야 하는데 천주 성령께서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수도원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 뽑기를 합니다. 수십 년째 해마다 뽑기를 하고 있는데, 제가 꼭 뽑고 싶은 열매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 그때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제가 이미 그 열매를 지니고 있어서 더 내려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설령 성령께서 그 열매를 저에게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주신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서로 다름을 통해서 모두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꺾으려 하셨을 때에도 그 방법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치의 성령이 함께하시는가 아닌가 여부에 따라 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기도 하고 또 갈라놓기도 합니다.
같은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들을 모두가 공동선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또한 나에게 더 주신 선물을 그 선물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름’은 마치 이가 꼭 맞는 톱니바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또 뽑기를 하겠지요. 제가 갖고 싶은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라도 많이 받기를 바라면서 뽑기에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성령, 일치, 용서> 송영진 모세 신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사도 2,6-11). 이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도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세계 각지에서 온 각계각층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고, 사람들은 그 용기와 확신에 대해서 놀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요한 20,19)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즉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서 온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그 '용기'를 그들이 받은 첫 번째 '성령의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5)."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설교는 사실은 '성령의 설교'이고, 그들의 언변과 지혜도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로봇처럼 설교를 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간 일, 사람들 앞에 선 일,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를 한 일 등은 모두 사도들 자신들이 자신의 의지로 한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도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는 일은 사도들이 해야 하는 일이고, 그런 사도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들이 용기를 낸 일과 성령께서 용기를 주신 일이 합해진 일이 바로 성령강림 때의 사도들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읽어 보면 뛰어난 말재주를 과시한 연설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대한 고백과 증언이고,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선포'입니다. 결국 사도들의 '언변과 지혜'는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는 믿는다." 라는 고백과 증언을 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말재주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고백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이 설교를 할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들이 여러 나라 말로 복음을 선포했지만 하나의 복음을 선포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 듣는 쪽에서 생각하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들었지만 하나의 복음을 들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복음은 하나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일치를 나타냅니다. 동시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하나의 믿음을 증언했고, 하나의 복음을 선포했고, 듣는 사람들도 그것을 그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 쪽에도 성령의 은혜가 내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치'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신앙인들 쪽에서도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분열되어 있는 신앙인들이 성령을 받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쪽에서도 모두 하나가 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겉으로는 언어의 일치가 이루어진 일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이 일치를 이룬 일입니다. 마음이 통하니까 언어가 통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의 분열을 나타내는 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입니다(창세 11,1-9).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으셔서 사람들이 흩어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람들 쪽에서 생각하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흩어졌기 때문에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20,2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곧바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요한 20,23). '용서'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용서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럴 때에 잘못한 쪽에서 회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미움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이 모여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모인 이곳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들은 안정된 노후를 위해서, 갑작스러운 사고를 대비해서, 병원비 절감을 위해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각종 보험에 가입합니다.
보험에도 종료가 많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를 위한 화재보험, 재난과 사고를 대비한 생명보험,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교육보험, 건강을 위한 의료보험, 안정된 노후를 위한 연금, 자동차 운행을 위한 자동차 보험, 주택 마련을 위한 주택청약, 요즘 선전을 많이 하는 상조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저도 자동차 보험에 가입했고, 의료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으며, 동창신부가 책임을 맡고 있는 평화상조에도 가입했습니다.
보험의 정신은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후를 위해서, 갑작스러운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성령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성령은 박해와 고통을 극복하는 굳셈을 주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도록 믿음을 주었습니다. 성령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은 세상의 어떤 보험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보험은 가입을 하고 보험료를 납부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주님을 믿고 따르며 마음을 열면 하느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시는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절제, 진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하느님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강림의 축제가 된다.
전례와 그리고 미사는 하느님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성령으로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아멘.”
성령강림의 커다란 의미는 ‘하나 됨’이라 생각합니다. 분열과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 신분과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사도들의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습니다.
지구촌에는 아직도 많은 분쟁이 있고, 그런 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체 허망하게 죽어갑니다. 여기에는 증오와 미움, 분노와 편견 그리고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는 나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관계가 분노와 미움, 욕심과 질투입니까? 아니면 평화와 기쁨, 용서와 사랑입니까?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반영억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놀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 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성령, 우리 생명의 의미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 우주는 온통 잠을 깨고
왕국을 낳는 산고로 신음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 강림의 축제가,
전례는 기념이자 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대주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곤드레 만드레 취한 한 남자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곧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신부가 안에 있다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 고해실의 작은 가림 막을 ‘똑,똑,똑’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그 쪽에서 말했습니다. “노크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쪽에도 휴지는 없어요!”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 술 취한 사람과 성령에 취한 사람이 비슷하답니다.
말수가 는다. 노래를 한다. 권한다. 운다. 용감해 진다. 지배당한다. 중독된다. 안주가 필요하다(말씀).냄새를 풍긴다.(성령을 받은 사람은 향기를 풍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