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2015. 5. 29. 금)(루카 9,23-26)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의 첫 기념일이다. 이 124위는 바로 지난해 8월 16일 이 땅의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다. 곧,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로,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분들 가운데 한국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주교회의 1997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그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 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 29일은 한국 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나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로 정하였다.
지혜서에서는 의인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의인이 현세에서 복을 누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죽더라도 그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린다.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산다. (지혜서 3,1-9)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 목숨이다. 목숨을 잃는다면 온 세상을 얻어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핵심 주제는 영원한 생명이다. (루카 9,23-26)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미사를 봉헌한 이후 오늘 첫 번째로 이 복자들의 기념일을 지냅니다. 지난해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올린 시복 미사의 감동이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 복자를 조상으로 모신 이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보였고, 그들이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묵상한 지혜서의 단락을 보면 세상을 떠난 의인들의 영혼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루카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 신앙을 고백하며 목숨을 바친 이들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순교하고 싶으십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할 수는 없겠지요! 시복 조사를 할 때, 순교자들은 순교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기 때문에 제1차 기적 심사에서 관면을 받습니다. 그만큼 순교는 특별한 은총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을 복자로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복자가 되든 성인이 되든, 이미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신 분들에게는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신심 행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복 시성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을 마음이 없다면 그 시복 시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하려는 열망이 더없이 컸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지요(요한 15,13 참조). 박해가 그친 다음에도 순교하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삶,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갈망이 있는지요. 적어도 복음에 따라 살기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포기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생각하고 싶은 내용은, 예수님 말씀대로 나는 나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지 여부가 아니라, 내가 의무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는지, 아니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크고 작은 일에서 나를 버리려는 의지가 내 안에 있는지, 그것입니다. 참으로 장한 순교자들의 모범을 뒤따르고 싶으십니까?

<순교> 송영진 모세 신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의 인생만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라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현세의 인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는 "이 세상에서의 목표와 희망을 모두 이룬다고 해도 (바라는 것들을 모두 얻는다고 해도)"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등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할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게 된다고 해도, 그것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또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것들이라면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애쓴 일은 허무한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희망했습니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신분 상승을 먼저 희망했을 것이고.)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자기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 그런 정도가 그 시대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허무하지 않은 것, 즉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찾아다니다가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종교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믿게 되었고,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조선시대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들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린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박해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을 순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순교할 각오를 하고(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각오한 대로 실행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안 죽어도 되는데 일부러 죽은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순교자가 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리는(바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의 희망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희망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풍요로운 생활... 출세, 성공, 부귀영화...그런 것들을 얻어서 일생 동안 잘 살다가 죽는, 그런 정도의 희망.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희망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저쪽 세상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이 허무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를 알고, 영원한 것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 출세, 성공,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잘 살면 더 좋은 일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안 된다."입니다. 두 가지 희망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린 다음에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하는 것은 한 가지 희망이 아니라 두 가지 희망입니다. 영원한 것은 허무한 것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것과 허무한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영원한 것을 외면하고 허무한 것을 선택하는 일 자체가 악입니다.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것은 악이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죄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지키면서 죽을 것인가? 신앙을 버리고 살 것인가? 를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박해가 없을 때 꾸준히 신앙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박해도 시련도 고난도 없을 때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에는, 즉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서는 문제가 단순해서 선택하는 일도 단순해지지만, 박해가 없고 편안할 때에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거나, 아니면 문제가 무엇인지 아예 모를 때도 많고, 방심할 수도 있고,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조선시대보다 지금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지난 해 8월
한국 땅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려주셨지요.
그분들의 첫 기념일을
오늘 지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모로코에서 순교한 6명의 형제 수사들 땜에
기뻐하고 영예롭게 여기는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랐는데
우리는 그저 그분들의 영광을 자랑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복자들의 첫 축일을 참으로 기뻐함은
우리도 그분들처럼
우리 일상의 십자가를
"무겁다, 힘들다, 내려 놓고싶다" 하기보다는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 순교복자들이여,
우리도 우리의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아멘.
[출처] 2015.05.29.|작성자 알타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