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2015. 5. 17.)(마르 16,15-20)

주님 승천 대축일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회는 이 대축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일인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중 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의 사도직 수행을 위하여 각 나라마다 홍보의 날을 제정하기를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1967년 ‘홍보의 날’이 제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부터 기존의 ‘출판물 보급 주일’과 통합하여 해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홍보 주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에 오셨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을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갑시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사십 일이 지난 다음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제자들은 더 이상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 1,1-11)
에페소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음을 찬양한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에페1,17-23)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일하신다.(마르16,15-20)
시편 47(46),2-3.6-7.8-9(◎ 6)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또는 ◎ 알렐루야.)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16,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복음을 살펴보면 승천이 주님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 에페소서의 심오한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 승천은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경축해야 할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시어 아버지와 함께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승천은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영광스러운 당신 신성을 드러내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분명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제자들의 믿음으로, 희망으로, 증언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승천은 우리에게 ‘아직 아니’라고 충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세상에 머물러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신학적으로 지극히 미성숙한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가상일 뿐입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곧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때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 권한으로 정하셨다고 밝히신 뒤, 오히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물론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 가야 합니다.
사도들과 같이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주님 승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제 눈으로 직접 뵈옵는 믿음과 신앙은 끝나고, 그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초월하시는 주님과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승천은 하나의 시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여 떠나간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하며 희망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바야흐로 기쁨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것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헤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도 번뇌도 절망도 죽음도 결코……!

<승천> 송영진 모세 신부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20)."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신 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순교 직전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사도들도 스테파노도 분명히 무엇인가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환시나 환상이 아닌 생생한 현실로서...
그렇지만 사도들과 스테파노가 말한 '하늘'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하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말한 '하늘'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또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또는 서 계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똑같은 분으로서 똑같은 영광을 누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떻든 사도들과 스테파노는 하느님으로서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을 목격했고,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영광 속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승천 전에는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 분이었는데, 승천 후에는 하느님으로서 사람들 가운데에 존재하시는 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가 하느님으로 바뀌셨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 쪽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천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13)."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에페 4,15)."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는 것" 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가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그곳에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천당, 연옥, 지옥 가운데 한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묵시록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천당, 연옥, 지옥은 최후의 심판 전까지의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지옥 자체가 소멸됩니다. (물론 사심판 때의 선고가 공심판 때 번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3-15)."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죽음과 저승(지옥) 자체도 심판을 받게 되고, 죽음과 저승(지옥) 자체가 소멸됩니다. 남는 것은 하느님 나라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을 받은 뒤에는 천당, 연옥, 지옥 가운데 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든지, 아니면 못 들어가고 영원히 소멸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연옥에 간 사람들은 보속을 하기 위해서 간 것이기 때문에 보속을 다 마친 다음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하는데, 사람들의 인생이 전부 다 허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되는 사람의 인생만 허무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쾌락에 취해서 살고,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지금의 인생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무엇인가를 잔뜩 소유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의 인생은 정말로 허무합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믿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승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 노력은 자신의 인생을 허무하게 끝내지 않기 위한 노력입니다. 지금은 신앙생활이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날이 되면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노력한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15.5.17.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사도1,1-11 에페1,17-23 마르16,15-20
승천(昇天)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참 기쁜날 예수승천대축일입니다.
대축일 중에도 하늘 '천(天)'자가 붙는 대축일은 오늘 하루뿐입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예수님 하늘에 오르심으로 하늘은 영원히 예수님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영원한 고향(故鄕)이, 본향(本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을 때 마다 바라볼 곳이 생겨 좋습니다.
사실 제가 28년째 여기 요셉수도원에 와서 생활한 이후 가장 많이 바라본 곳이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지금도 새벽 일어나 문밖에 나서면 우선 바라보는 곳이 불암산 배경의 하늘이요, 이어 하늘 공기를, 향긋한 하느님 향기를 깊이 들이 마십니다.
'늘 그리스도를 호흡하라'는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의 말씀을 상기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호흡합니다. 하여 최초의 시집 이름도 '하늘과 산'이요, 얼마 전엔 자칭 '천산(天山)'이란 호도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19년전, 1996년 1월 11일, 19년전 왜관수도원에서 피정지도를 끝내며 수사님들과 함께 낙동강 곁 수도선배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방문할 때 써놓은 최초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아련한/산능선들 잔잔히/흐르는 강물
파아란 하늘/새록새록/돋아나는 그리움에 파아란 하늘/내 마음에/흰구름 하얀 글씨로
당신 이름 써보았습니다/하느님!- (1996.1.11.).
그해 가을, 창문밖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며 쓴 시가 또 있습니다.
"그리움이 깊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되었다
영원한 하늘이 되었다 침묵의 하늘이 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 되었다 하느님의 눈이 되었다
나는“(1997.11.27)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흡사 나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처럼, 눈빛처럼 느껴졌던 강렬한 체험이 1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느님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저절로 눈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침 어제 면담성사중 자주 분노로 괴로워한다는 형제에게 요셉수도원의 로고를 형제의 핸드폰에 붙여주며 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욱하고 분노가 솟아오를 때 즉시 이 요셉수도원 로고의 불암산 배경의 하늘을, 하늘 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체를 바라보십시오.
또 얼른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분노도 사라질 것입니다.”
늘 하늘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오늘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아침 수도형제들과 신명나게 부르던 아침성무일도 찬미가 1절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주님 승천 대축일의 기쁨을 요약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갈망하던 날, 거룩한 주님의 날 밝아 왔으니 세상의 희망이신 우리 주 예수, 오늘날 높은 하늘 오르셨도다.“
하늘을 잃어버린, 잊어버린 현대인일수록 내면 깊이에서는 하늘이신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은 바로 내 마음 하늘 안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승천의 삶'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본향, 승리, 희망과 기쁨이란 네 키워드(keyword) 말마디가 강론의 중심입니다.
첫째, 하늘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 본향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을 향한 그리움의 삶이 승천의 삶입니다. 저절로 초연한 자유로운 삶에 드높여지는 우리의 존엄한 품위입니다.
하늘을 잃어, 잊어버려 세상의 노예가 되어 땅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눈들어 하늘보며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기도하라고 어디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향수의 근원이 바로 하늘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함은 바로 하느님 본향을 그리워함입니다.
귀천(歸天), 소천(召天)이란 말마디 역시 하늘이 우리의 본향임을 입증합니다. 오늘 말씀도 하늘이 우리의 본향임을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모두 신화적 표현입니다만 깊은 진리를 함축한 말씀입니다. 바로 하늘이 상징하는바 하느님 계신 우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예수님을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신 하늘 아버지께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하느님이신 당신을, 그리고 하늘에 올림받으신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둘째, 하늘은 우리의 영원한 승리를 상징합니다.
주님 승천의 삶은 바로 승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전쟁의 삶이요 죽어야 비로소 승리의 안식이요 휴식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바로 평생영적전쟁의 승리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될 때 승리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신록의 영혼, 신록의 기쁨, 신록의 희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 2절이 파스카 주님의 위대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위대한 투쟁으로 개선하시고 세속의 우두머리 패망한 다음 성부께 당신 얼굴 보여드리며 승리한 육신 영광 봉헌하셨네.“
다음 에페소서 찬미가도 주님의 영원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권세와 권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승리의 터전위에 자리잡은 성교회입니다.
다음 요한복음의 주님 말씀도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승천하신 파스카의 주님의 승리를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이미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하늘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승천의 삶은 바로 희망의 삶, 기쁨의 삶입니다. 삶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희망을,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여러분은 광야 세상에서 무슨 희망, 무슨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희망을, 기쁨을 잃어버린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외관상 화려합니다만 희망과 기쁨이 사라진 오늘의 현실입니다. 희망과 기쁨이 사라진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아침성무 찬미가 3절, 4절이 이런 희망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빛나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며 믿는 이 모두에게 희망 주시고 일찍이 원조들이 닫아버렸던 천국의 닫힌 문을 열어주셨네.“
"동정녀 낳아주신 우리 구세주, 매맞고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 성부의 오른편에 좌정하시니 모두가 큰 기쁨에 용약하도다."
하여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승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바로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을 바라볼 때 샘솟는 희망에 기쁨입니다. 하늘을 봐야, 하늘을 바라보고 희망과 기쁨을 숨쉬어야 삽니다.
이렇게 살아야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성인입니다.
예수님을 하늘에 불러 올리신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오늘 대축일 미사에 참석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깨달아 열린 눈으로 보면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늘입니다. 희망이 샘솟고 승리가 이뤄지는 하늘입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면서 동시에 교회를 통해 제자들인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바오로의 교회론은 얼마나 깊고 은혜로운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교회 안에서 이미 하늘의 고향을, 하늘의 승리를, 하늘의 희망을, 하늘의 기쁨을 앞당겨 살고 있는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그 아버지 하느님에 그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매력이 넘치고 멋지신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그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통해 부자간의 사랑의 유대를 유감없이 보여주셨고
우리 모두 승천의 삶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거룩한 승천대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유언하십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유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아멘.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선포했다 이기양신부
'승천(昇天)'이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오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하늘에는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이 사는
나라가 있고 땅 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 승천입니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러한 승천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61년 세계 최초 우주 비행사로서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 일주에 성공한 옛 소련 우주
비행사 가가린은 "하늘에 올라가 우주 공간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기에 신은 없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에 반해 아폴로
15호를 타고 네 번째로 달에 간 미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하늘에 올라보니 우주의 광대한 모습과 아름다움에 하느님께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듯이 주님 승천의 뜻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천사들과 함께 좌정하고 계신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시인 고 천상병은 시 「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하늘나라임을 시인은 예리한 감수성으로 남다르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이제 예수님 생전의 이스라엘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처럼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은 하늘나라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한계 있는 인간 삶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승천 신앙인 것입니다.
2000년 7월
30일, 대학 4학년이던 아리따운 처녀 이지선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로, 응급실을 향해 달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환자 곁을 지키던 오빠는 "살 가망이 없으니
동생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지선의 상태는 4~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중상환자로 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한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7개월간 입원, 11차례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 화상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이지선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사는 것은, 살아남는 것은, 죽는 것보다 훨씬… 천 배 만 배는 힘들었습니다. 그 귀한 삶을 동정하지 마십시오.
넘겨짚지도 마시고 오해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절망이 얼마나 사람을 죽이는 것인지, 희망은 얼마나 큰 힘이 있는 것인지, 행복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정말
세상에 부질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아무리 힘들 때에도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네게 희망이 있다'는 하느님 말씀이 들려와 참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를 살려주신 섭리가 있으실 테니까요." 살더라도 사람 꼴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지만 외국으로 유학 가 재활상담과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이지선의 이야기입니다.
이렇듯이
부활과 승천을 믿는 신앙인들은 세상을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를 희망하면서 삶의 어려움들을 극복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살고 선포하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실천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완성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계신 하늘나라에서 이뤄질 것이며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승천 대축일 ( 昇天大祝日 ) feast of Ascension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은 사도들에 의해 목격되었는데, 신약성서에서는 이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마르 16, 19; 루가 24, 51; 사도 1, 9 ).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좌정(座定)하심’으로 표시되는 그분의 복권(復權)에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예수님의 절대 우위권이 드러난다.(예컨대 요한 14, 2; 필립 3, 21).
승천 대축일(부활 대축일 다음 여섯 번째 목요일에 경축됨)은 그리스도교 전례력에서 중요한 대축일들 가운데 하나이며,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이날을 의무 대축일로 지내야 한다.(교리서 660-667).
(현대가톨릭수첩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