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5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2015. 7. 5. 오전 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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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7월 5일 주일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여호야다 사제는 아탈야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가 우상을 숭배하는 요아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자 요아스는 그를 죽인다. 요아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역대하 24,18-22)

바오로 사도는 역경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환난은 언젠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며, 그 희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5,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마태 10,17-22)


시편 31(30),3ㄷㄹ-4.6과 7ㄴ과 8ㄱ.17과 21ㄱㄴ(◎ 6ㄱ 참조)
◎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소서. ◎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성무일도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몽골의 첫 신학생이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올해 부제품을 받았고, 두 번째 신학생도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박해 시대에도 우리나라에는 선교사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고 지금 몽골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있지만, 한 나라에서 그 나라 출신 첫 번째 사제는 그 나라 교회 전체를 위하여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려고 몽골에서 파견된 첫 신학생들은 몽골 교회의 미래를 짊어진 이들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몽골에 돌아가 돌보아야 할 후배들과 신자들에 대한 강한 소명감과 책임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이와 같으셨을 것입니다. 최초의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유학하여 공부하시면서, 늘 우리 교회의 앞날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박해받는 교회, 목자 없는 양 떼! 이 땅에 돌아와서는 사제로서 짧은 삶을 사시고 순교하셨으니,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영광이야 아쉬움이 없으셨겠지만 이 양 떼를 두고 가시는 간절한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김대건 신부님이 피로 순교하셨다면,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땀의 순교자,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두 분 신부님들이 오래 사셨다면, 사제 부족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초창기 우리나라 교회가 뿌리를 내리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아주 인간적인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이와 달랐습니다. 우리 인간은 통계나 경험을 토대로 만사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 생각이 다를 때,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지요.


한국 교회가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한 것은 순교자들의 피와 전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없는 오늘날,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가 순교 정신을 잊고 복음에 대한 충성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오늘 특별히 김대건 신부님의 전구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박해>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7)." 이 말씀은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는 "박해자들을 조심하여라."인데, 박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를 받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꼭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하느님(예수님)께서 박해 자체를 막아 주실 수는 없는가?" 하느님(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하려고만 하시면 '박해'라는 것이 아예 생기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1,6-7.공동번역)."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믿음이 그저 그런 상태였다가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면 더욱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과 고난 덕분에 정신을 차려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그렇게 될 수도 있고,편안할 때보다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 주님을 더 간절하게 찾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박해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고, 하느님(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박해를 일으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종교박해를 받지 않았어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서 성인품에 오른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거의 대부분 다른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반대로 박해 때문에 믿음을 아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마태 13,21).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기쁘게 받았지만 '뿌리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는, 즉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편안할 때에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봐야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박해는 알곡과 쭉정이를 미리 구분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그러나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박해를 일으키신다는 것은 아니고, 결과가 심판 때와 비슷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참고 견디면 알곡이 되고, 포기하면 쭉정이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박해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몸이 편안하면 마음이 풀어지기 쉽다는 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2) 박해는 믿음을 증언할(복음을 선포할) 기회가 됩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이 말도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시대 때에 사도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시 교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예루살렘에서의 성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랬다가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닥치자 신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고, 그 일은 다른 지역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도 8,1.4).

3) 긍정적인 결과가 생긴다고 해도, 그래도 박해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반역죄이고, 순교자들은 그 범죄의 피해자들입니다. 이것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할 때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그래서 박해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이 말씀은 신앙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무력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박해자들과 싸우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하느님께서는 왜 박해를 막아주시지 않는가? 라고 물었지만,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셨을까?"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박해를 받는 것을 보고만 계실까?"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또 카인도, 박해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예가 다윗을 박해한 사울의 경우입니다. 사울 왕도 원래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입니다.

박해자들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지만,  그들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박해자들 앞에서 믿음을 증언하는 것은 사실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박해자들도 구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7월 5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로마 5,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기에
자랑스러워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 때문에
당신 사랑을 충만히 여러분에게 부어주셨기에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환난이 닥쳐오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됩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환난이 닥쳐 왔나요?
그 때문에 죽을 지경이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나요?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내 꼬라지가 비참하나요?

아니지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있지요?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께서 나를 붙잡아 일으켜 주실 것을
기다리시겠지요?

여러분이 그런 분이시기에 축복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사람이기에
진정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 축복을 되새김하는 복된 주일 되소서~~^^


[출처] 2015.07.05.|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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