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외딴곳 (마르 6,30-34)
(농민 주일)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이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목자는 임금을, 양 떼는 백성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임금과 지도자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왕국이 멸망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 흩어진 양들을 다시 모으시고 정의를 세울 임금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예레 23,1-6)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하나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에페 2,13-18)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아가는 군중을 가엾게 여기시어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착한 목자시다.(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
없는 양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금
여기서 '군중'은 예수님을, 즉 목자를 찾아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보였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참 목자를 찾아서 예수님께 오기 전까지 군중은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했지만, 이제
드디어 참 목자를 만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라는 말은 당신이
참 목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빵의 기적'을, 예수님께서
당신이 참 목자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군중이 참 목자를 찾아서 예수님께 오긴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 목자란 어떤 목자인지를 모르거나 참
목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어서 여전히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모습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은 뒤에,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요한 6,15)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그런데도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된 것은, 자신들이
목자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이기도 합니다.
1)
양들이 목자를 떠나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됩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비유가 루카복음 15장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치 부모 없는 고아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을 '자유'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진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비참하고 외로운 신세일 뿐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떠나면, 처음에는
목자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제가 사실은 '보호' 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2)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된 데에는 사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율법
실천만 강조하고, 사랑과 자비와 용서 대신에 처벌만 이야기하고, 형식적인
전례만 거행하고,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마르 11,17)로 만들고,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같은 말만 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아니라 무서운
폭군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목자이신
하느님을 떠나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목자를 떠난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옛날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황이 중요합니다. 우리는(나는)
지금 목자가 있는 양인가? 목자가 없는 양인가? (목자를
떠난 양인가? 목자와 함께 살고 있는 양인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계속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목자를 떠난 상태이고, 목자 없는 양처럼 된 상태입니다.
양이
목자와 함께 산다고 해도, 목자의 말을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그
양은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제대로
목자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말로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특별히 더 강조하셨습니다(요한 15,12). '사랑'이
없다면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경우에, 그는
겉으로는 성실하게 일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사실은
함께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로서'
살지 않고 '종으로서' 살았기 때문입니다(루카 15,29). 그는
몸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마음은 부모 없는 고아처럼 살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교회법 잘 지키고, 미사 참례 잘하고, 성경 잘 알고, 교리 잘 알고, 헌금 잘하고... 그런다고 해도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과 다를 것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목자 없는 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기쁨이 용솟음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주님!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아픈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등 소외되고 도움이 절실하며 인간적으로 홀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가 없어 흩어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고 찾아 나서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는 시련을 겪을 때,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몸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안일과 즐거움만을 찾아 헤맬 때에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했을 때,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우리 인생살이는
충분한 여유를 갖고 살 때가
별로 없습니다.
별로 한 일도 없어보이는데
바쁘게 살다보면
한달이 훌쩍 가 버리는 걸 보면
언제 한번 여유롭게 좀 쉬어보나 할 때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여름 성수기가 시작된다니
휴가철이 시작되나 봅니다.
여러분들은 휴가계획을 세우셨나요?
어떤 분들은 좀 길게
또 어떤 분들은 짧게라도
휴가를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휴가를 마치고나면
더 피곤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에 치여 사는데
휴가 때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보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번 휴가는
좀 외딴 곳으로 ◆
가 보라시네요.
참으로 조용히 잘 쉬고
올 수 있는 곳으로
한번 잡아 보세요.
평소에 꼭 만나뵙고 싶었던 분을
잠시라도 찾아뵙는 것도
좋은 휴식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번 휴가를 다녀와서는
피곤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도록 해봅시다.
잘 놀다왔다가 아니라
잘 쉬고왔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잘 쉬는 주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19.|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