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18,19ㄴ-22)

(남북통일 기원 미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신명기는 장차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잃고 흩어지게 될 것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 불행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와 말씀을 듣는다면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이들을 다시 모아 주실 것이다.(신명기 30,1-5)
에페소서는 신자들에게 서로 용서할 것을 권면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길이다.(에페소서 4,29―5,2)
복음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마태18,19ㄴ-2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지극히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잘못한 사람이 바로 나의 “형제”라는 점을 전제하고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커다란 잘못을 하였다 하더라도 형제가 아니라면 좋았던 우호 관계가 깨지는 것으로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고용 관계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원만한 노사 관계가 깨질 수 있습니다. 우정이 그렇게 깊지 않은 친구라면 서로의 마음이 상하는 정도에서 불편한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관계는 어떤 일, 어떤 대가나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형제라는 관계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사뭇 다릅니다.
어린 시절 형제들 사이에 자주 다툰 경험이 있으시다면 잘 알 수 있듯이, 형제들 사이의 화해와 일치는 서로 잘못한 것이 없을 때에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 해도 그 잘못보다는 형제라는 유대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일흔일곱 번”, 그 횟수를 헤아려 보라는 뜻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세 번, 또는 열 번 용서하고 칼로 가차 없이 두부를 자르듯 그렇게 의절하고 끊어 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너무나도 오랜 기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과, 정치, 경제, 사회 특히 이념적인 차이와 간극이 현저하게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요원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우리가 한 형제, 한 민족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설령 오늘내일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형제를 적으로 생각하고 화해와 일치를 도모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일삼는다면, 하느님의 자비로 무한한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처신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본받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지난해 여름 사목 방문을 마치시고 로마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은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남북한은 한 형제입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머니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분단의 고통은 매우 큽니다. 저는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는 분단이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
* ‘나와 너’
두 사람입니다. 단지 ‘두 명’을 염두해 두신 뜻은 아닌 듯합니다.
검지손가락을 펴서, 한번은 ‘나’를 가리켜 보고, 다음은 맞은편에 있는 ‘누군가’를 가리켜 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을 만들어 봅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질(?)이 요즘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손가락을 내 쪽으로 가리키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이놈의 손가락이 좀처럼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향해 가지 않습니다.
그런 내 모습에 가슴이 아려서 세상 현자들의 가르침을 뒤적여 봅니다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세상은 이런 자기만을 가리키려는, 이기적인 ‘나’를 아주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합니다.
내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고,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랍니다.
맞은편의 이 ‘누군가’는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뭘 느끼는 지, 뭘 원하고 바라는지 신경을 끄랍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 밖을 절대 나올 수 없는 존재라나요.
우리는 온통 ‘나’만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너’가 없습니다. ‘나’라는 글자의 모음을 다만 한 번이라도 안으로 접으면 보이는 ‘너’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나 마음을 모으고, 그래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서로를 채워 줄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서로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에 안도하며 더 이상 내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요.
- 김태홍 신부(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 -

06.21.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분단과 불통이라는
슬픈 우리 현실안에서
화해와 일치가
진정 무언지를 주님께 다시 묻게 됩니다.
화해와 일치는
과장하지 않는 우리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진실된 회개가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자비가 필요한 약자들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화해는 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없는 화해는
진실된 화해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건 화해와 일치입니다.
화해는 서로간의 존중으로 깊어집니다.
작은 용서들이 모여
큰 용서를 이루어 냅니다.
사랑과 용서는 하나입니다.
다함께 잘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절실한 기도가 있는 곳에
뜨거운 용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일치의 기초작업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용서의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용서는
하느님의 가장 간절한 뜻임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품고 기도로 시작되는
화해와 일치의 기쁜 주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와 더불어 성장하는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12주일<믿는다면> “왜 겁을 내느냐? (마르코4,35-41)
송영진 모세 신부
6월
21일의 복음 말씀은 '풍랑을 가라앉히시다(마르 4,35-41).'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 즉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2.
예수님을 믿는다면 어떤 위험한 상황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제자들이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그냥 계속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교회'로(또는 개인의 '인생'으로) 해석하고, 거센
돌풍과 파도를 교회가(또는
신앙인이) 겪는 박해, 고난, 시련 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이야기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을 만나도, 아무리 힘든 시련과 고난을 만나도,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간에.
처음에는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워하고 겁을 냈던 제자들이고, 그래서
예수님한테 자주 혼났던 제자들인데, 나중에는
믿음과 용기가 가득한,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됩니다.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사도 12,4). 그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 거센
돌풍과 파도 때문에 겁을 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사도 12,6)."
날이
밝으면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도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자고 있습니다. 그냥
잔 것도 아니고,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베드로 사도를 깨울 때 그의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워야만 했습니다(사도 12,7).
전에
매일미사책 '오늘의 묵상'에 이런 내용의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교구의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거센 파도를 만났다. 배가
침몰할까봐 무척 겁이 났다. 그래서
위험에서 구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교우들이 타고 있으니 이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바다가 고요해졌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런
글을 읽으면 금방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월호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또는
"세월호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고, 탈출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았던 사람들인가?")
아무리
교회에서 발행하는 책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교우들이 타고 있으니 이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만수무강과
무병장수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만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고, 온갖 재난과 불행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당합니다.
또
세월호 참사와 같은 불행을 당해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뜻'이나 '하느님의 섭리'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질병,
사고, 재난 자체가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특히
인간의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악의에서 비롯된 사고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
말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내느냐?"가 아니라, "왜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겁을 내느냐? 살든지 죽든지 나만 믿어라."가 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아무리
힘든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 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만
믿으면 살 수 있다."가 아닌 것이 됩니다.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상의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육신의 목숨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지키려고 하고, 그것을
잃을까봐 겁을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육신의
목숨과 지상의 인생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재난과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재난과 시련 속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고, 불행하게도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고... 살아남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고... 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래도
어떻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불행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과 저쪽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세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내세의 생명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절망과 포기가 진짜로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우리 성심원 성당이
새것이 되었습니다.
낡고 험하게 보이는 성당이 늘 거슬렸는데
다른 공사관계로 페인트 업자들이
들어 온김에 성당 도색을
새로 하기로 하였답니다.
도색을 한지 10여 년이 된지라
완전 새성당으로 변했답니다.
우리 자신도
낡고 추한 모습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형수술이 성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내면이 아름다워지는 것이겠지요?
오늘 나를 새롭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봅시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만드는 것도 나를 새롭게 만드는 방법이지요.
그러기 위해 꾸준히 소식하고 운동도
부지런하게 해야겠지요.
내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꾸준히 기도하고 말씀묵상도
부지런히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영육이 새로워진
건강하고 아름다운 오늘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6.21.|작성자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