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겨자씨 비유 (마르 4,26-34)

2015. 6. 13. 오후 8: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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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마르 4,26-34)


에제키엘 예언서의 구원에 대한 약속은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알리는 심판 선고에 이어서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들의 힘에만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무의 연한 순을 다시 심으시고, 시든 나무를 살아나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에 비유하신다. 농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곡식이 자라듯이 하느님 나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라난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 나라도 이처럼 놀랍게 자라난다(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2013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민족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말씀이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됩니다. 향백나무 새순에서, 곧 유배 중에 있는 여호야킨 임금의 후손에게서 미래 왕국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새들이 향백나무 아래 깃들이듯이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도 미래 왕국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맨드라미 씨앗처럼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이것이 제대로 자라면 2-3미터 이상의 나무가 되어 온갖 새들의 안식처가 되기 때문에 겨자 나무는 정원에서 가꾸는 식물이 아니라 야생 식물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믿음이나 신앙,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것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제1독서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방에서도 제국의 위대함과 막강함을 웅장한 나무로 자주 표현합니다. 곧 제국 안에서 피난처와 보호를 구하는 백성들을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새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모든 민족이 한데 모여 그 안에서 주님의 보호와 은신처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웅장한 나무, 광대한 나라로 자라나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땅에 뿌려진 씨앗이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과 “믿음”을 대비시켜 설명하는데, 그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확신을 더 강조합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1코린 7,31 참조).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고통과 시련이 늘 뒤따를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애가 이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래서일까요? 그는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성장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나라가 이렇게까지 성장했구나 하고 자기 만족에 빠진다면 커다란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매일 그대로이고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는 듯하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가 자라지 않고 요지부동이구나 하고 실망하는 것도 착각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자라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에 그 나라가 자라났는지 여부는, 제2독서에서 선언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 큰 나무가 되어 - 겨자씨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는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는 일이고, '저절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1.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 2.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하느님께 떠넘기면 안 된다."입니다.

땅에 씨를 뿌리는 일과 밭을 가꾸고 돌보는 일과 열매를 거두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씨에서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할 일을 다 하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만일에 사람이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그러면 원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씨를 뿌렸더라도 밭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새들이 와서 씨를 먹어버리거나(마르 4,4), 가시덤불이 자랄 것입니다(마르 4,7). 그래서 결국 원하는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창세 11,1-9). 그 이야기를 보면,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려고 했고,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려고 했습니다(창세 11,4). 그들은 하느님께 도전하고, 하느님과 맞서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는 말은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만 간다면, 어떤 일이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의 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전에는 못하던 일이었다가 지금은 할 수 있게 된 일들이 많은데, 그런 과학 기술들에 대해서 '선'이다, '악'이다, 라고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사용하는가? 입니다. (방사선을 발견해서 암 치료에 사용하게 된 것은 '선'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폭탄을 만든 것은 '악'입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사도 8,1). 그런데 그 신자들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나긴 했지만, 비겁하게 도망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을 찾아다닌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은 그런 땅을 발견하기만 하면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 신자들과 새로운 교회가 생기고 그 교회들이 성장하게 된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11,19-21)."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

유대계 신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그리스계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로 전해지는 모습은 곡식이 자라는 과정과 같습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도 뜻은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를 밭에 뿌리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처음에 씨를 뿌릴 때 큰 나무로 자라게 될 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만일에 씨가 너무 작다고 실망해버리면, 그래서 아예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는 기대했던 것만큼 큰 나무가 되지 않았다고 실망한다면, 그래서 그 나무를 가꾸고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큰 나무가 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고, 씨를 땅에 뿌리라고 권고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는 1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메르스로 인한 불안과 근심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자가 격리된 사람은 3000명이 넘었습니다. 확진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시설에 격리된 사람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사망자도 10명이 넘었습니다. 단 한명의 메르스 환자가 이렇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불안과 걱정은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각종 모임은 취소되었고, 관광객은 줄어들었고, 학교는 휴교를 하였습니다. 메르스가 초래한 경제 손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희망의 씨앗도 커져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 꽃동네가 추구하는 정신입니다. 본인도 구걸을 하는 할아버지가 구걸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젊은 신부님이 그것을 보고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꽃동네가 되었습니다. 꽃동네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느끼고 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님께서도 꽃동네는 꼭 가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꽃동네의 수녀님들과 2년을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교리를 가르치시고, 차량 운전을 하셨고, 성당과 화장실 청소를 하셨습니다. 텃밭을 가꾸어서 신자 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수녀님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이었습니다. 꽃동네는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아프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힘없는 한 할아버지의 나눔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씨앗을 이야기 하십니다. 길가에 버려질 수도 있고, 가시밭에 떨어질 수도 있고, 자갈밭에 떨어질 수도 있는 씨앗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근심과 걱정이 있었지만 교회는 성장하고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은 1784년 한국 땅에도 심어진 것입니다. 한국 땅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도 100년이 넘는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교황님께서 3번이나 방문하셨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근심은 걱정과 불안을 자라게 합니다. 근심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분노를 열매 맺게 됩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렇게 커다란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근심의 바다에 침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면 감사와 기쁨이 자라게 됩니다. 용기와 위로, 용서와 나눔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우리 마음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힘차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과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선택하면 근심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설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나라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특정한 시간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을지라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소통의 나라, 흐름의 나라입니다.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함께 있든지, 떠나 있던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일방적인 나라입니까? 기도와 대화가 함께 있는 가정입니까? 함께 살지만 하숙집과 같은 가정입니까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모든 날, 주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주님의 집은 넓은 평수의 집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화려한 주택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작고 초라할 지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집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집입니다. 기도와 나눔이 함께 하는 집입니다.

조재형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마르 4,26)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멋지고 기쁨으로 충만한
동화 속에서나꿈에서나 그려볼 그런 곳인가요?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처럼 말씀하시네요.
겨자씨 같기도 하고 누룩 같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형이라기보다는 진행형이랍니다.

그러니
부자처럼 돈이 많은 상태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한푼두푼 모아가는 과정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수재인 아들을 둔 것이 천국이 아니라
대기만성형 아들을 둔 것이 천국이랍니다.

아름답게 활짝 핀 장미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수줍게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이름모를 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인생살이가

때론 힘들고 고달프다해도
그 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이기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천국을 향한순례의 여정
기쁘게 걸어가는 아름다운 날 되소서.

[출처] 2015.06.14.|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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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4동성당 제2회‘본당의 날’명랑운동회
- 일 시 : 6월 14일(주일) 09:30 ~ 16:30
- 장 소 : 창동문화체육센터 실내체육관
- 내 용 : ① 주일미사(09:30) ② 명랑운동회
- 성당의 주일미사 : 06:30, 19:00 미사만 있습니다.
※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오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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