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탈리타 쿰!” (마르 5,21-43)
(교황 주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 없음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지혜서는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기억한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도록 만드셨고,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이 악을 선택할 때에 비로소 죽음을 자신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다.(지혜1,13-15; 2,23-24)
예수님께서는 본디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셨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너그럽게 베풀 것을 권면한다.(코린후 8,7.9.13-15)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사람들이 생명을 되찾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마르 5,21-43))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내 목숨 나의 것이니 내 인생 소신껏 마음대로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애원합니다. 피붙이를 낳아 지금까지 키워 왔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들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는 수많은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친밀함의 표현으로 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호칭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당연히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딸’에게 생명과 행복을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통계 수치에 따르면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건강을 해치는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스스로 정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존재하여 살도록 만드셨음을 강조하면서, 만물이 창조된 본디 목적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데, 특히 그분의 창조 계획에 따라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따라서 지혜서는 인간이 본디 악하기 때문에 애써 그 본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결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보다 우리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본디의 선한 모습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특별히 어리석은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믿음과
희망> 송영진 모세 신부
6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5장 21절-43절,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혈하는 여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병자 치유 이야기'이지만, 여자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나았고, 그
다음에야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소녀의
아버지 야이로가 예수님께 올 때에는 병든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고, 소녀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병자 치유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혈하는 여자 때문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일이 지체되어서 소녀가
죽은 다음에 그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로 바뀌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소녀가 죽은 다음에 야이로가 예수님께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세부
사항은 생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음서
저자의 설명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 여자의 상황은 한마디로 '절망'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5-26)." (요즘에도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는 병자들이 많습니다.)
'야이로'의
상황도 '절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5,35)." 물론
처음에 야이로가 예수님께 올 때에는 딸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집에 도착하시기 전에 딸이 죽었기 때문에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었던 여자는 희망의 빛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마르 5,27)" 마르코복음
3장을 보면,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는데(마르 3,10), 그렇게
해서 병을 고친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희망의 빛을 따라서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고,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마지막이고 유일한 희망이신 분입니다.)
그
여자가 자기가 들은 소문대로 하려고 생각한 일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복잡하고 힘든 치료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소문을 못 믿고 의심한다면, 또는 말도 안 된다고 비웃는다면 처음부터
예수님께 갈 생각도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께
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병을 고치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계속 못 믿을 것이고, 혹시
예수님의 옷을 만진다고 하더라도 속마음으로는
"이렇게 한다고 병이 낫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무 일도 안 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야이로의 경우에는 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제 다 끝났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야이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희망할 수 있고, 희망한다면 믿어야 합니다. 사실
믿음과 희망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병이 낫고, 죽었다가도
살아난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일까? 여자는
믿고 희망한 대로 병을 고쳤고, 야이로는
믿고 희망한 대로 딸을 되찾았는데, 그것으로
끝인가? 그
여자와 그 소녀가 그 뒤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그 여자와 야이로와 그의 딸에게 주신 것은 지상에서
끝나버릴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 인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건강해진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쳤다면, 또
야이로와 그의 딸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쳤다면, 그들이
얻은 '몸의 건강'과 '수명 연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저 몸의 병이나 고치자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병에 걸려서 누워 있는 것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건강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상에서 온갖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누린다고 해도,한 줌 흙으로 허무하게 사라진다면 하루살이와 다를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 5,41)
새로 태어난 아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잘 아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그러겠노라 하였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프랜시스 마리아야, 어서 일어나거라!"
"탈리타 쿰!"
여러분도 오늘 저와 함께
이 아이를 위해
탈리타 쿰을 외쳐 주십시오.
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서도
"탈리타 쿰"을 외쳐 주십시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세상이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되도록
노력하시는 교황님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여
힘차게 일어서실 수 있도록
교황 프란치스코를 위해서도
"탈리타 쿰" 하고 기도합시다.

[출처] 2015.06.28.|작성자 알타반
<하혈하는 부인>(마르 5, 21- 43) -유 광수신부-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의 손에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바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여인도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부인이다. 이 부인은 어떤 여인인가? 복음이 이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느라고 고생을 하였고,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혈하는 부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이 부인이 처해진 상황이 곧 세례 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즉 죽음의 병을 치유 받지 못한 채 죄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곧 세례성사이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죽음의 병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로 그리고 죄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오늘 이야기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죽도록 고생만 하던 여인이 결국 죽었다."라는 이야기로 끝났다면 삼류 소설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만일 그런 소설이라면 "참, 안됐다. 불쌍하기도 하지!"라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불행했던 한 부인의 삶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까지 받은 행복한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 부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으로 돌아설 수 있게 되었는가?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라고 복음은 적고 있다. 즉 부인이 깊은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그녀를 구하게된 첫 번째 출발점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나서부터이다.
아마 "예수님"이라면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 분이시라는 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시라면 자기 병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생각했을 것이고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고 꼭 그분을 만나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참에 '예수님'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 부인이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듣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부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한가닥 희망을 갖고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 있는 분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이 부인에게서 어떤 일이있더라도 그냥 지나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이름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이 순간은 적어도 부인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이처럼 이 부인에게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이고 급박한 순간에 이루워진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부인은 그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자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에 따라서 듣는 것도 다르며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오는 소문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다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 부인의 절박한 상황이 예수님의 소문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뜨려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이 부인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 부인처럼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을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나에게 들려 오는 예수님의 소문은 어떤 소문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가? 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한 적이 있는가?
우선 이 부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마음 자세가 달랐다. 복음은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고만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부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간절한 생각으로 따라 다녔다. 부인의 자세는 맹목적인 따름이 아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자세가 진지하고 간절하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 하는 의심이라고는 이 부인의 자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은 한점의 부끄럼이 없이순수했고 절대적이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그 믿음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이 부인의 마음은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그 부인의 발에는 힘이 들어 있고,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을 것이고,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현실로 이루워지리라는 확신이 더욱 그녀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에 손댈 수 있는 거리에까지 왔을 때 이 부인은 온 정성과 설레임과 신뢰심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복음은 "과연 곧바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극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과 직접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그 믿음의 행동이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낫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4-17)라고 말한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닐까? 이 부인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마르 4, 8)라고 말씀하신 대표적인 모델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읽어 보면 "손을 대다."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손을 대다."는 말이 무엇일까? "손을 대다"는 것은 하나의 표현방식이다. 즉 마음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부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손을 대는 것에도 여러 상태가 있을 것이다. 마음 없이 건성으로 만지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이 부인처럼 온 마음을 다해 옷을 만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이 부인이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온 정성을 다해 온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부인처럼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진다.'는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