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토요일]성령모독 (루카 12,8-12)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10년 무렵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간직하여,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다.(로마 4,13.16-18)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시편 105(104),6-7.8-9.42-43(◎ 8ㄴ)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 당신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한 말씀 기억하셨네.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라고 말씀하신다. 박해를 받고 회당이나 관아에 끌려가게 될 때에도, 답변할 말은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의묵상>
바오로 사도는 구원은, 율법 준수라는 행업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구원이 은총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러한 믿음은 또 하나의 율법, 또 하나의 행업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시절의 사울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뒤의 바오로, 율법을 지키는 행업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 사이의 차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 달려 있는가에 있습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먼저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분께서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외에 다른 아들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창세 17―18장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으로” 그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약속하셨기에 그는 믿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약속이 없다면 믿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할은 이차적이며, 믿음에 앞서 하느님의 은총이 늘 먼저 갑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오직 교의를 참된 것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곧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그분께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용서>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즉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아야 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는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천사들 앞에서' 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을 법정 상황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는 피고인이고, 하느님은 재판장이시고, 천사들은 배심원들이고, 예수님은 변호인이 되는 상황입니다.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신앙인이
아닌 척 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 앞에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증언하시는
것은,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증언(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시다가 심판 때에 그대로 앙갚음 하시겠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앙갚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28,20).
또 하느님과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시는 분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안다고 증언하실 분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해 주실 변호를 '지금' 미리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기를 바라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구원을 못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이 말씀의 뜻은, "나를 안 믿은 사람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와 용서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아도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무리 작은 죄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끝까지 안 믿는다면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여기서 '용서' 라는 말은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구원을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용서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구원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쪽에서 용서를(구원을) 안 받는 것입니다.
사제가 고해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어도, 아니면 아예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주려고 해도, 고해성사를 보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고해성사를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셔도 사람 쪽에서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면 예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 4,18)
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조차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언급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그랬습니다.
희망이 절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닥까지 내려 간 사람은 이제 더이상 내려 갈 곳이 없고
올라 갈 일만 남았으니 희망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그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닥을 차고 올라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동네친구들과 냇가에서 멱감으며 깊은 곳 바위에서 다이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깊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중도에 발버둥치며 올라오다가 엄청 물을 많이 먹고 혼난 적이 있어
물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바닥을 치고 더 쉽게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을 괜한 두려움에
억지로 발버둥치다가 더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의 진리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추락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을만큼 견딜 힘을 주신다.
더 큰 기쁨과 축복을 위해 작은 추락은 마땅히 견디어내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올라가고 있나요?
그럼 힘차게 비상하십시오.
내려가고 있나요?
세상 바닥을 더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모두가 축복입니다.
오르막도 축복이고 내리막도 축복입니다.
올라감도 축복이고 내려감은 더 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