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금요일]바리사이 누룩 (루카 12,1-7)
구약의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역설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되었다. 의화가 행위의 결과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마땅한 보수일 것이다.(로마 4,1-8)
형제 여러분, 1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시편 32(31),1-2.5.11(◎ 7 참조)
◎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
○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을 벗이라 부르신다. 또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귀하게 돌보신다.(루카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의 묵상>
이웃에게 늘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야. 모두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거든.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결점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우연히 그의 곁을 지나던 천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정말 그렇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을 보세요. 비록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저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설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잘 봤군요. 너무도 잘 알고 있군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 한 가지만은 파악하지 못하는군요. 그것은 당신이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데는 눈이 멀었습니다.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형식이나 겉치레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참으로 소중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등하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리사이들이 빠진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는 마태 13,33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에서 누룩은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누룩은 반죽 안에 골고루 퍼져야 합니다. 반죽 어느 곳에서도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룩을 넣었을 때와 넣지 않았을 때의 모습은 천양지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선은 누룩과 닮았습니다. 좋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선한 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위선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비난하시는 것은 그들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향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지적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켰기에 “당연한 보수”로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행한 업적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가 그들의 행위를 변질시켰지요.
혹시라도 우리의 착한 행동에 나쁜 누룩이 스며들고 있지는 않는지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행동을 가장하여 의인인 척하는 사람보다는 어리석어도 정직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기 때문에,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린다면 한 마리는 거저 덤으로 팔리는 것인데, 그렇게 팔려 나가는 참새마저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정을 구체적으로 면밀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박해, 유혹>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루카 12,3)."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 말씀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를 증언하여라.", 즉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5)."
이 말씀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의 멸망'입니다.
'박해자들'은 우리의 육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 권한이 없는 자들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도, 또 영혼에 대해서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죽는 것이 두려워서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배교하고 박해자들에게 굴복하면 육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순교하면, 그것은 육신의 목숨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박해를 막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실 박해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그들도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를 막아 주시지 않는 것은, 신앙인들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 일이
아니라, 박해자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적이 될 것인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박해자들이 스스로 선택할
기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예외적으로 직접 개입하신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감옥에서 구출하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사도 12,6-11).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직전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할 때에는(사도 12,2)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박해자 사울이 갑자기 회개하고 사도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입니다(사도 9,3-19).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는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도 나중에 모두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는 개입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보고만 계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어떻든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방관'이나 '방치'가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뭔가 더 큰 계획, 어떤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박해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우리가 박해를 받고 순교하고 그럴 때에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6-7)."
안 믿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스테파노를 비롯해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참새보다 못한 하찮은 모습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스테파노와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은 다음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대단히 고귀하고 위대합니다.
지금은 옛날과 같은 박해는
없지만,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해가 없더라도 '유혹'은 더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가장 심한 유혹은
"남들처럼 살아라." 라는 유혹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라. 사제 생활을 하더라도 모나지 않게, 튀지
않게, 다른 신부들처럼 살아라." 라는 권고 같은 유혹. 그런 말은 유혹이라는 표시가 안 나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그것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면, 물리치기도 어렵고, 신념을 크게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기준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이더라도 그 길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가면 안 됩니다. 고립되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루카 13,24). '혼자서라도'(외롭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가는 신앙생활이고,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고 해도, 또 사제나 수도자로 산다고 해도, 그 '삶'이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박해가 두려워서 배교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ㄷ)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5ㄴ)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2장 4~12절에서 환난을 이기는 신앙에 대한 교훈을 주시기에 앞서서 12장 1~3절에서 제자들에게 박해와 환난을 가져다 준 주역이 될 바리사이들의 정체를 밝히며, 그들의 위선을 경계하신다.
'조심하여라'로 번역된 '프로세케테'(prosechete; beware; be on your gaurd)의 원형 '프로세코'(prosecho)는 '~을 향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붙잡다'는 뜻의
동사 '에코'(echo)가 결합된 형태로서 '어떤 대상을 행하여 마음이나 생각을 붙잡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로 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와 '너희 자신들에게'라는 뜻의 재귀 대명사 '헤아우토이스'(heautois)가 덧붙여 사용되어,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할 것을 좀 더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누룩'에 해당하는 '쥐메스'(zymes; leaven; yeast)는 바리사이들이 행하는 모든 위선적 행동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데 사용된 '누룩'이 지닌 대표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부패성인데, 당시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을 만드는 데 있어서, 누룩을 섞은 반죽이 오래 되면 그 반죽은 부패하여 나쁜 냄새를 내고 부패하고 만다. 이러한 누룩의 부패성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방치하면 모든 사람들을 부패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둘째로 파급효과인데,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것처럼 바리사이들의 위선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신속하게 파급될 것을 상징한다.
셋째로 누룩은 겉으로는 쉽게 구별되지 않지만, 열을 가하면 결국 드러나고 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루카복음 12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사이들이 아무리 겉으로 자신을 위장할지라도 마지막 때에는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
이러한 속성은 '누룩'이 '위선'으로 번역된 '휘포크리시스'(hypokrisis; hypocrisy)와 동일한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휘포크리시스'(hypokrisis)는 원래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위선'이란 자신의 본 모습은 숨긴 채, 자기의 가장된 모습을 드러내는 위선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누룩은 이것에 대한 좋은 상징이 되는 것이다.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나'(geenna; hell)는 원래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의 히브리어 '게힌놈'(gehinnom)의 희랍어 음역이다.
'게힌놈'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어린 아이들을 몰록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었다.(레위18,21; 예레7,32).
이러한 행위는 요시야 임금의 종교 개혁에 의해 근절되었지만(2열왕23,16), 이곳은 계속하여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예레7,31; 19,6).
후에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버려지는 쓰레기 및 죄인들의 시체 등이 계속해서 타오르는 곳이 되었다(예레18,1-4; 19,2.10-13; 느헤2,13).
이러한 이유로 이곳은 마지막 심판 후에 악인들이 계속해서 불타는 지옥으로 상징되었다.
즉 '게엔나'는 확정적인 하느님의 심판에 의하여 영원토록 고통받는 곳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바로 이러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보낼 권한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할 존재는 바로 최후의 심판에서 죄인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보내는 하느님이심을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다'('포베오'; 'phobeo'; fear)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루카 12,1-2)
누룩은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부풀리고 떠벌려서
마치 사실인 양 왜곡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인 것을 부풀리고 떠벌려서
그 원래 의미를 왜곡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짐만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재촉하십니다.
사랑이 아닌 이유로
다른 사람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떠벌리고 부풀려서
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 바로 그런 위선이 아닐까요.
오늘은
뭐든지 자꾸만 부풀리려는 우리 마음의 못된 관성을 주시하며
부풀어 오르지 못하게 한번 해봅시다.
부풀리는만큼 상처는 덧나게 되고
가라앉는만큼 상처는 치유됩니다.
알타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