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간 월요일]탐욕 (루카 12,13-21)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들을 바랄 수 없는 나이였지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다.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함을 믿었던 것이다.(로마4,20-25)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은 20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깨닫게 하신다. 재물을 쌓아 놓고 그것을 누리면서 쓰더라도, 목숨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루카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의 묵상>
소유한 재산을 마음껏 써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해서 아쉬운 사람보다는, 살아가야 할 날이 구만리 같이 멀게 느껴지지만 의식주가 걱정이 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곧 끝날 수도 있다는 사소한 깨달음이 있다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까이 지내는 분이 갑자기 큰 병에 걸려 병문안을 갔을 때, 지금부터 나의 생명이 꼭 1년만 주어진다면 그 기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이 단지 1년이라면, 오히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다 접어 두고 별다른 애착이나 집착 없이 할 수 있는 만큼만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절박하고 참담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의 업적 하나 남기려고 몰입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수명을 연장해 보려고 투병 생활에 전념하느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중한 1년을 다 써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와 세상일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벌어 소유하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보입니다. 물론 자기가 애써 벌어 늘린 재산이겠지만,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땀과 희생, 심지어는 눈물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시어(시편 90,12 참조)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청해 봅니다.
<탐욕> 송영진 모세 신부
10월
22일의 복음 말씀은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탐욕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풀이한 것과 같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고 5,1-6)."
복음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부유한 사람'은 원래 부자였는데 많은
소출을 거두어서 더 부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모든 곡식과 재물을 보관할 방법만 궁리하고, 그
재산으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날 밤에 그의 목숨을 가져가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런데
그 부자가 순전히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일해서 많은
소출을 거두고,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는
일꾼들을 고용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지었을 것이고, 이웃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꾼들이나 이웃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소출을 거둔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그
부자가 고용한 일꾼들에게는 계약한 대로 정당한 품삯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노동자의
품삯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 또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실천 여부입니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그 부자의 모습에는 사랑은 없고 이기심만 있습니다.
'사랑'이란
계약한 것 이상으로 베푸는 일입니다.신명기에
이런 율법이 있습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와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지나온 것을 따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1)."
룻기에
나오는 '보아즈'는 룻이
수확꾼들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주워 모을 수 있게 허락할 뿐만 아니라 종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흘려주라고 시키기까지 합니다(룻 2,16). 보아즈는
율법에 정해져 있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어떻든
'내 밭에서 난 것'이라도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만 생각하고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어리석음이고, 자기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면 저 세상에서 멸망할 것이고,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서 혼자서 살다가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탐욕은 부자들만의 죄가 아니라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다 경계해야 하는 죄입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가지려고만 하고, 가진 다음에도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멸망시킬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자본의 힘으로 빼앗아서 부자들이 더 부유하게 되는 자본주의도 나쁘고, 부자들의 것을 폭력으로 빼앗는 공산주의도 나쁘고...
제29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2,13-21)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5)
원문에는 '탐욕'(貪慾) 혹은 '탐심'(貪心)이라는 단어가 '플레오넥시아스'(plleoneksias)이다.
기본형은 '플레오넥시아'(plleoneksia)인데, '더 많은'이라는 뜻의 '플레이온'(plleion)과 '가지다'는 뜻의 동사 '에코'(echo)에서 파생된 '엑시아'(eksia)의 합성어이다. 영어로는 'greed','avarice','covetousness'로 번역되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분수에 넘치도록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파세스'; 'pases'; all) 탐욕을 경계하라고 했으므로, 단순히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히 욕심을 부리게 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금전, 부, 권력, 지식,명성, 쾌락 등등)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여라'라는 원문의 단어는 '호라테'(horate)로서 특별히 경계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용법으로 쓰였는데, '삼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경계하여라'라는 원문의 단어는 '퓔라세스테'(phyllassesthe)로서 원형 '퓔랏소'(phyllasso)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이다. 여기서 중간태란 그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나타낸다. 영어로는 'beware','watch out','be on your guard'로 번역될 수 있다.
모든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을 명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원문은 수시로 마음속에 들어오는 탐욕(탐심)을 물리치는 데 급급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애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굳게 막아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 것들의 한계, 예를 들어 물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물질이며,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선익과 공동선을 위해 올바로 쓰지 못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도 영원한 생명(구원)도 잃어버린다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아예 애당초 자신의 분수를 벗어난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단어는 '죠에'(zoe)인데, 이 '죠에'는 '죽음'과 대조된 육체적 생명(1코린3,22)과 하느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초자연적 생명'(요한3,15)으로 구분된다. 루카 복음 12장 15절의 '생명'은 당연히 후자의 의미이다. 이 세상의 소유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everlasting life)을 말한다. 이 생명의 속성은 '영원성'(eternity)인데,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이야기 하신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려 더 깊은 지옥에 떨어질 것 같으면,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구원)을 받기에 삯이 노랄 것 같으면, 그 어리석은 부자가 가진 것을 다 거두어 가버리신다는 말씀이다.
'맑은 가난'의 의미를 지닌 '청빈'(淸貧; poverty)과 '탐욕'(貪慾)의 글자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청빈'의 '빈'(貧)은 '조개 패'(貝)에 '나눌 분'(分)이지만, '탐욕'의 '탐'(貪)은 '조개 패'(貝)에 '지금(이제) 금'(今)자이다. 옛날에는 조개 껍질이 화폐의 구실을 했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진정한 가난(청빈)이며,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더 가지려고, 아니면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움켜잡는(grasp; grip; take hold of; seize)것이 탐욕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로마 4,21)
여러분은 사람을 잘 믿는 편인가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험이 있어 잘 못믿는 편인가요?
누구나 한번쯤은 사람을 믿었다가 낭패 본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이 나도 모르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도 생겨난 것이겠지요.
그래도 신앙인은
말 그대로 믿음의 사람이기에 백에 아흔아홉 번 속더라도
믿어주고 또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중 한 사람이라도
내가 믿어줘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고
회개의 삶을 살아 구원을 얻게 된다면
아흔아홉 번을 속아도 성공적(?)이라 할 수 없을까요?
신앙인이라지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조차 "에이 그게 이루어질라고?" 하며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어떤 죄중에 있더라도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노래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못믿고 하느님의 구원능력도 믿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얼마나 믿고 살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나는 믿는 자(신앙인)인가요?
안 믿는 자(불신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