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간 화요일]깨어있어라 (루카 12,35-38)
아담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모든 이가 그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가 의롭게 되어 생명을 누린다.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내린다. 모두가 죄인이기에 모두에게 은총이 필요하다.(로마 5,12.15ㄴ.17-19.20ㄴ-21)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40(39),7-8ㄱㄴ.8ㄷ-9.10.17(◎ 8ㄴ과 9ㄱ 참조)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을 찾는 이는 모두,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열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 ◎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준비를 갖추고 그분을 맞이하는 이들은 행복하다.(루카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오늘의 묵상>
대신학교 1학년 신학원론 시간에 쪽지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 범위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한 부분이었고, 여러 문항 가운데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라고 말할 수 있다.”였습니다. 여러분도 맞혀 보세요! 정답은 ‘이면(裏面)’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원죄론과 로마서를 배우고 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출발점으로 하는 원죄 교리는, 인간 본성의 악함을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넘치도록 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점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가 열렬한 바리사이였을 때에는 스스로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을 찾지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오로는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로마 7장, 금요일 독서 참조). 이 깨달음이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나의 의로움을 당연히 갚아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거저 베푸시는 당신의 은총으로 나를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80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은 당신께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실 그분을 철저하게 신뢰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재림>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오늘복음 말씀인 루카복음 12장 35절-38절, '깨어 있어라.'의 내용과 루카복음
17장 7절-10절, '겸손하게 섬겨라.'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12장
35절-38절에서는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고 있는데, 17장
7절-10절에서는 주인이 종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종'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17장 7절-10절의 내용은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이고, 12장 35절-38절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종이 얻게 될 행복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두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밖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주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는 밖에 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렸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시중을 들게 됩니다. 밖에서 종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든지, 집에서 종을 기다렸든지 간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에게 최상의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17장 9절의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은,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주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 (연인 사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은 사실상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린 시절에 혼자서 집을 지키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분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몽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춘향의 심정?)
그래서
신앙인들이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한
일을 심판받기 위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전의 무서운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또는
지상에서의 수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재림하신 주님의 심판이 무서운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온각
억울하고 서러운 일들을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바로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요한
묵시록을 마치면서 묵시록 저자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바오로
사도도 "마라나 타!" 라고 외쳤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로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마라나타'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다면, 자기가 왜 그분을 무서워하고 그날을 무서워하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엄마의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와 뭔가 잘못한 일을 해서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의 차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18-19)
내가 죄를 짓거나 법을 어기면
나 하나의 문제인 것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파생효과를 지닙니다.
우선 나 스스로 우울해지거나 화를 내게 되고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쁜 기운을 불어넣게 됩니다.
이렇게 죄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답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은총을 받아누리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 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마다 기쁨과 즐거움을 꽃피우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은총지위에 머물러 있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은총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려는 자세가 순종의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오늘 순종의 사람이 되어 은총지위를 누리고
그리하여 나와 나를 만나는 모든 이가
기쁨과 복락을 함께 누리도록 해보지 않으렵니까?
2015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2,35-3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5~36)
루카 복음 12장 35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루카 복음 12장 35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모습이다. '페리에조스메나이'(periezosmenai; girded about)는 '띠를 매다'는 뜻의 동사 '페리존뉘미'(perizonnymi)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미 허리에 띠가 매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당장 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며,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 매야만 했다. 여기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문맥상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혹시라도 나태해져 방심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등불을 켜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켜 놓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kaiomenoi; burnning)는 '불을 켜다'는 뜻의 동사 '카이오'(kai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5,1~13). 따라서 본문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있어라'에 해당하는 '에스토산'(estosan; let be)은 '에이미'(eimi; be) 동사의 현재 명령형 3인칭 단수로서 '계속적으로 있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이미'(eimi)동사는 '있다' 또는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여기서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몬'(gamon; wedding banquet)의 기본형 '가모스'(gamos)는 혼인 잔치 자체를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졌기에, 그 주인이 혼인 잔치로부터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이 되므로, 그 종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배경 설정의 이유만이 아니라, '혼인 잔치'는 천상에서의 기쁨과 영광의 혼인 잔치를(묵시19,9), '그 주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혼인 잔치의 집'은 하늘 옥좌를 암시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으로 번역된 '아날뤼세'(analyse; he will return)의 기본형 '아날뤼오'(analyo)는 '풀다'는 뜻에서 발전하여 '떠나기 위해 천막을 걷거나 배의 닻줄을 푼다'는 점에서 '떠나다','출발하다'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집을 떠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옥좌를 떠나 내려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